Zion Church :: '석공' 태그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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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믿고 가르치며 예슈아 마쉬아흐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Yaacob

'석공'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4.02.03 네 손을 내밀라
2014. 2. 3. 06:01 외솔/네 손을 내밀라

네 손을 내밀라

"예슈아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슈아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슈아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슈아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마가복음 3장 1절-6절)

 

갈릴리 분봉왕 헤롯 시대의 수도는 성경에 지명이 언급된 바 없는 세포리스(Sepphoris)라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나사렛에서 북서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당대에 갈릴리 중심 도시로 화려하게 치장된 아주 번화한 도시였습니다. 예슈아께서 어린 시절을 시골 나사렛에서 사셨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분이 도시에 관한 지식을 세포리스에서 습득하셨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이곳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하여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예슈아께서 청년 시절에 세포리스에 자주 가셨기 때문에 도시의 생활상, 세리들의 형편,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생활상에 대해 정통했습니다. 오늘날 세포리스에는 4,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의 유적을 비롯하여 공중 목욕탕, 체육 경기장, 수로 등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세포리스에 한 석공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돌을 깎거나 다듬는 일에 종사하여 가족의 생겨를 꾸려나갔습니다. 성실하게 일하고 참되게 살고자 꾸준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오른손이 위축되면서 저리고 서서히 마비되는 것이었습니다. 일손을 멈추고 손을 주무르고 흔들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저린 것을 풀려고 애를 썼지만 불행하게도 손은 점점 핏기와 수분이 없어지면서 회복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나니 결국 오른손은 전혀 쓸 수 없을 정도로 마비돼 말라비틀어져 버렸습니다. 

 

이 의원 저의원 으로 가 보았으나 그 당시의 어떤 의술로도 고칠 수 없다는 선고만 받았습니다. 오른손은 말라비틀어지고 힘없는 왼손만으로는 석공일을  할 수가 없어서 그 석공은  마른손을 내려다보며 자꾸 "휴 휴" 한숨만 내쉬며 점점 절망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손을쓰지 못하면 결국 빌어먹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장래가 암담하였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후에 석공은 예슈아 일행이 세포리스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온갖 불치병과 난치병을 간단하게 고치신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옳지 나도 그분에게 내 손을 치유해 달라고 부탁해야지 그분은 분명히 마쉬아흐인 모양이야." 그 순간 마음에 마쉬아흐에 대한 예언이 떠올랐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마 11:5).
  

바로 그런 일이 예슈아에 의해 일어나고 있으니 그분은 틀림없는 마쉬아흐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리하여 석공은 치유의 소망을 안고 예슈아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너무나 많아 그분께 접근하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슈아를 대면하여 치유를 부탁할 수 있을까를 그는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갑자기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면 거기서 반드시 예슈아를 만날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지요. 그리하여 석공은 안식일 아침 일찌감치 회당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슈아께서는 그의 규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오셨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법에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이 마른 환자는 주위의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손을 치유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결코 놓칠 수가 없어서 그는 용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 간청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을 내걸고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경전에 들지 못한 "묵시록 복음서" (Apocryphal Gospel)에 보면 석공은 예슈아께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고 합니다. "예슈아여, 나는 손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석공입니다. 청컨대 나의 손을 회복시켜 주시사 나로 하여금 양식을 빌어먹는 수치를 면케 하여 주옵소서."
                                

석공은 일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주님께 치유를 간청했습니다. 석공의 말라비틀어진 오른손을 내려다보신 주님은 그런 손으로 가족의 생겨를 꾸려 가기란 심히 어려울 것이라 판단돼 마음이 아주 측은해지셨습니다. 동정심 많은 주님께서는 불쌍한 자를 보실 때마다 항상 연민의 정을 억제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 당시 손 마른 병은 비록 불치병이었으나 주님께서는 간단히 고쳐 주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회당에서 주님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눈이 석공과 예슈아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에 집중되었습니다. 예슈아께서 소문대로 과연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아니 고치시는가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만일 석공의 손을 고쳐 주신다면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예슈아를 고소할 참이었습니다.

 

그들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만큼의 중죄를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환자의 병을 고쳐 주는 것을 하나의 세속적 일을 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지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과연 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안식일에 병을 무료로 고쳐 주는 것과 돈을 받고 고쳐 주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유대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환자를 무료이든 유료이든 치료하거나 고쳐 줘서는 안된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여인이 출산하는 것과 출산을 도와 주는 일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어 모태에서 세상에 나오는 아이를 아무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안식일에 팔이나 다리가 골절 됐을 때 만일 그것을 치료한다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됐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수족(手足)이 삐었을 때 만일 물에 담그면 그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안식일에 베인 손가락 상처에 고약을 바르면 안되었지만 붕대를 감는 것은 괜찮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안식일에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는 것은 괜찮지만 치료하는 것은 안된다는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적군이 쳐들어와도 공격은 물론 자신을 방어하거나 진지를 방어하는 일까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병역을 면제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만일 입대시켰다가 안식일에 적군이 공격해 올 때 그들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고집하여 응전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이런 율법적인 배경에서 볼 때 손 마른 자는 당장 생명의 위협이 없는 병이므로 안식일이 아닌 날 고쳐 줘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슈아를 고소할 빌미를 찾고자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그런 절대 부동의 규정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유대인의 그릇된 법을 타파하시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여도 괜찮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기적을 행하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회당 한가운데 앉아 있던 손이 마른 환자에게 일어나라고 하신 후에 먼저 당신의 주위에 앉아 있는 율법 전문가들에게 정곡을 찌르는 아주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질문은 정말로 그들에게 치명타였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잠잠했습니다 (막 3:5).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습니다. "기회가 있음에도불구하고 선을 행하지 않거나 생명을 구출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안식일에는 그런 모든 규정이 해당되지 아니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잠잠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비록 그것이 선행이라 할지라도 일해서는 안되며 생명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일하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 그릇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소할 빌미를 찾고 있다가 궁지에 몰린 바리새인 중 한 사람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 12: :11).
예슈아께서 여유있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마 12:13).
                                                           

이는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시는 참으로 놀라운 선포였습니다. 안식일에 아무런 일이라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던 그들에게 선한 일은 해도 괜찮다고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에게 먹을 것을 갖다주는 것과 양을 건지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라고 긍정적으로 말씀하시므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뒷받침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주님께서 병을 고치시면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고소하고자 벼르고 있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그릇된 안식일관을 버리지 않고 있는 유대인의 그 완악함에 근심하셨을 뿐만 아니라 노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분노는 정의의 분노 곧 의분으로서 애끊는 심령으로 적대자들의 고집스런 완악함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마음을 꿰뚫는 안광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는 손 마른 환자에게 말했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이 환자는 안식일에 병고침을 받아도 괜찮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자기의 손이 낫기를 갈망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아! 이게 웬 일인가! 말랐던 손이 정상적인 혈색으로 돌아오고 마비됐던 손이 순식간에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이 아닌가! 실로 즉각적인 치유였습니다. 그는 건강하게 된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쥐고 마구 흔들며 기뻐 감격하여 예슈아께 거듭 사례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의 마른 손을 치유해 주시오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
  

즉시 회당 안은 수군대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줘도 되는가?"
"안되는데.. .."
"뭐, 괜찮겠지 ."

완고한 바리새인들은 분노를 터트리며 크게 소리쳤습니다. "아니 병을 고치는 일로 안식일을 범하다니 , 당장 고소를 해야겠어."
  

이리하여 예슈아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은 심히 옳다는 것을 친히 치유의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석공의 말랐던 오른손이 치유되므로 유대인의 관습은 자연히 정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적개심은 더욱 불타 올랐고 예슈아를 거룩한 안식일을 파기하는 자로 단정해 버렸습니다. 예배는 계속됐으나 바리새인들은 분한 마음으로 회당에서 나가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슈아를 죽일꼬 의논하였습니다. 헤롯당(Herodians)이란 헤롯 가계를 지지하는 정치적 집단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통상 헤롯당을 미워하여 원수같이 지냈으나 예슈아을 죽이기 위한 모의에는 정치적으로 결탁한 것입니다. 예슈아의 치유 행위는 그들에게 오히려 적대감을 증대시켰을 뿐입니다.
  

예슈아께서 안식일에 왜 기적을 행하셨을까요? 다시 말하지만 유대인들의 그릇된 안식일관을 바로 잡아 참된 안식일의 목적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생명을 구하는 일과 선한 일은 행해도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병자들을 보살펴 주고 치료해 주는 일은 안식일의 참된 목적과 일치하는 것이지요. 안식일이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속적인 일은 피해야하지만 선한 일은 즐거이 행하여 복받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을 너무 세세하게 규정하므로 마치 족쇄로 발목을 채우는 꼴이 되었고 세칙에 의해 선한 일까지도 할 수 없게 돼 버려 기쁜 안식일이 도리어 심적 짐으로 가중되는 하나의 수렁이 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에 대한 충성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보다 더 귀중하게 돼 버린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카비 1서 2:31-38(공동번역)에 보면 그 당시 안티오커스 군대가 안식일에 공격해 왔는데 동굴에 숨어 있던 일천여 명의 유대인들은 그날이 안식일이라고 굴을 막지 않았고 반항이나 어떠한 반격도 하지 않고 죽어 갔습니다. 안식일이라는 제도를 생명보다 더 귀중하게 여긴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제도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므로 안식일에 선한 일은 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구나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도 괜찮은 것 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손 마른 환자를 동조하여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치유 받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슈아의 치유 사업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육체적 노동이 아니라 말씀으로만 그 환자를 고치실 텐데 그것을 일로 보는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러 온 것이 아니라 고소거리를 찾고자 회당에 왔었지요. 배우려는 태도가 아니라 자기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바리새인 역할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신자와 목사의 결점에만 관심이 있고 교회 사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오히려 전도 사업에 방해자가 됩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자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석공이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동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치유 사건을 잘 분석해 보면 몇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마쉬아흐이신 예슈아께서 능히 자기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손 마른 병은 비록 그 당시 인술로는 불치병이었지만 주님은 쉽게 고칠 수 있다고 믿은 것은 훌륭한 믿음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예슈아를 마쉬아흐로 믿지 않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을 생각해 볼 때 그 당시 석공의 믿음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반신반의했다면 치유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둘째, 그는 마음속 믿음을 행위로 행사하여 예슈아를 만나기 위해 안식일에 회당으로 찾아갔습니다. 주님께 찾아가는 믿음이 치유를 체험한 두 번째 동인이었습니다. 믿음은 활용해야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셋째, 주위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예슈아께 치유해 줄 것을 간청한 것이 세 번째 동인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회당에 모여 있었지만 이를 개의치 않고 그는 예슈아를 보자마자 즉시 마른 손을 내보이며 치유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손을 낫게 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간청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그 당시의 관습을 깨는 매우 담대한 행동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권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석공을 치유하시는 예슈아의 모습에서 크나큰 믿음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두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첫째는 제도에 얽매여 무거운 심적 짐을 지고 허덕이는 매우 편협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죄를 향한 분노로 죄 없는 노하심이었습니다. 그분은 죄를 미워하시나 죄인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죄에 대한 분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은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는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자기를 죽이려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류를 바로 잡고자 옳은 일을 행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만일 안식일에 그들 목전에서 병을 고치면 유대의 법에 의해 범죄자로 고소당해 처단 받는다는 것을 잘 아셨으나 유전적 장벽을 무너뜨리고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손 마른 자의 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담대한 모습에서 진한 감동을 받게 됩니다. 우리도 옳은 일에 대해서는 정의감을 가지고 예슈아처럼 굳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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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aac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