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ion Church :: '안식일에 대하여/안식일과 구원의 관계' 카테고리의 글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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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대하여/안식일과 구원의 관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4.09.03 안식일과 율법주의에 대한 오해

안식일과 율법주의에 대한 오해

사람을 위한 안식일

안식일에 대한 현대 기독교회의 가장 큰 오해는 안식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이고, 일요일은 그리스도인의 성일 이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안식일은 창조와 동시에 제정되어, 아담 때부터 존속된 제도 이므로, 범죄와 상관없고, 유대인과도 상관이 없고, 의식적인 율법이나 십계명과도 시대적으로 상관이 없어, 안식일을 어느 시대에나 어느 민족에 국한시키려는 시도는 비성서적이다.

 

“안식일에도 주인”(막2:28)이신 예수께서도, 안식일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막2:27)이라고 천명하셨다. 창조와 동시에 안식일과 함께 제정된 결혼 제도가(창2:21-24)유대인만을 위한 제도가 아닌 것과 같다. 결혼 제도가 안식의 공간(空間)인 가정을, 제칠일이 안식의 시간(時間)인 안식일을 제공하므로 이 시간과 공간의 만남 속에서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하나님께 의존하며, 사람끼리 함께 사는 행복을 경험하게 하신 창조의 기본 질서인 것이다(출20:8-11).

 

이미 구약 성경에도 안식일을 유대인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만민의 안식일, 이방인의 안식일, 심지어 육신적인 미래가 없는 불구자(鼓子)의 안식일 등으로 규정하여 안식일의 시대성이나 민족적 제한을 철폐하셨다(사56:3-7).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리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사56:2).

 

그리하여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유대인만을 위한 의식법(儀式法)인 할례는 폐지시켜 결코 요구되지 않았지만, 안식일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이의 없이 공유했음을 사도행전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율법주의에 대한 오해

안식일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킨 사람은 모두 율법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가 만일 성서적인 진리라면, 어린 시절부터 돌아가시기까지 평생을 “자기 규례대로 안식일”을 지킨 예수님(눅4:16)을 비롯하여, 역시 유대교 모태 교인으로 “자기의 규례대로”(행17:2) 평생 안식일을 지킨 사도 바울도 율법주의자이고, 안식일을 준수하고 강조한 모든 노독들과 선지자들도 모두 율법주의자가 된다는 빗나간 결론에 이르게 된다. 두 개의 전제로부터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 추리 논법인 삼단논법을 잘못 적용한 착각의 결과 이다. 즉,

대전제: 그리스도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율법주의 자였다.
소전제: 바리새인들은 모두 철저한 안식일 준수 자였다.
결 론: 그러므로 오늘날도 안식일을 철저히 준수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주의자이다.

 

만약 이와 같은 잘못된 논리 전개가 사실이라면 걷잡을 수 없는 엉뚱한 결론들이 속출하게 된다. 복음서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이외에도 십일조, 헌금, 구제, 금식 기도 등에도 철저한 사람들이었다(눅18:11.12).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가 전개될 수 있을까?

대전제: 그리스도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 자였다.
소전제: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십일조와 헌금 구제 금식 기도를 실천했다.
결 론: 그러므로 오늘날도 십일조와 헌금 구제 및 금식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주의자이다.

 

십일조와 헌금, 구제와 기도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의무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가? 추리(推理)의 착각(錯覺)이다. 안식일이나 십일조, 헌금, 구제가 사람을 율법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 대답이 있다. 곧,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이제 분명해졌다. 십일조와 헌금, 안식일 등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를 삼을 때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의를 거절하게 됨으로 결국 행함으로 구원받으려는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을 준수하되 율법의 정신에 어긋나게 지키는 사람들은 율법주의자가 되지만, 의의 표준인 율법을 무시하고 고의로 범하는 사람들은 “무법한 자”(벧후2:7, 3:17), 혹은 “불법을 행하는 자”(마7:23, 13:41; 딤전1:8,9)가 되어 심판을 받게 된다. 편견 때문에 판단의 논리가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율법주의와 무법주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을 예수의 부활 사건과 관련지어 설명하면서 안식 후 첫 날 예수의 부활의 날을 기념하여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토요일에 해당하는 성경상의 제칠일 안식일을 율법주의적인 안식일로 규정하는 동시에 일요일은 부활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주일(主日)로 옹호하고 있는 것이 현대 기독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대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율법주의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섯째 계명에 따라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 여덟째 계명대로 도적질하지 않는 사람, 둘째 계명을 범하지 않으려고 신사 참배를 거절함으로 목숨까지 빼앗긴 순교자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비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넷째 계명에 따라 성경적인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람들만 율법주의자가 되는가?

 

율법주의자란 율법을 지킨 자신의 선행을 의로 삼아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만큼이나. “무법한 자”나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들 역시 율법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없다(마7:23 ; 벧후3:17 ; 살후2:3,7,8).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나,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행위도 결국 율법을 준수하려는 일임에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안식일 준수와 구원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가? 이러한 질문을 구태여 안식일에만 국한시킬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구원을 얻는가?” “도적질을 하지 말아야 구원을 얻는가?” 모두 같을 성질의 질문이다. 이런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우리는 부모를 잘 공경하고 도적질을 하지 않았어도 구원받지 못할 많은 사람이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기를 망설인다. 마찬가지로 무법한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갈5:19~21 ; 딤후3:2~5)임을 명시한 성경 말씀을 기억할 때, 우리는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꺼린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고 대답은 무엇인가?


 

앞에서 밝힌 대로 안식일은 창조와 구속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서 개천절과 광복절의 의미가 포개진 경우이다(신5:12~15).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가?”라는 질문은, “광복절을 지켜야 해방되는가?”라는 질문과 같아진다. 논리적으로 틀린 질문에는 바른 대답이 있을 수가 없다. 태어난 사람에게는 생일이 있고, 해방된 민족에게는 광복절이 있듯이 창조와 구속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에게는 안식일의 존재와 필요가 절실해진다.

 

창조 때부터 존재한 안식일이 실제로 도덕의 법칙인 십계명 함께 성문화(成文化)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후인 시내산에서였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포함한 십계명이 구원의 근거가 아닌 것은 틀림없다. 구원의 근거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상징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곧 십자가이다(고전5:7). 하나님께서도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출20:2)고 전제하신 후 안식일을 포함한 십계명을 지키도록 명하셨다. 안식일의 경우는 이 사실이 더욱 강조되었다(신5:15).

 

구원의 결과인 안식일

십계명이나 안식일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명시되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받은 구원을 보존하고 경험하는 방편이다. 한국에 살면서 미국의 헌법을 준수하고 독립 기념일을 철저히 지켰다고 미국에 영주 이민을 허락 받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런 것들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 않았어도 미국이 호의로 발급한 사증(査證.비자)을 근거로 이민 자격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다(엡2:8,9).

 

그러나 일단 자격을 얻어 이민하면, 미국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 이민(移民)의 조건으로가 아니라, 시민(市民)의 자격과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영주권자나 시민권자가 되고도 고의로 법을 범하거나 무시하면 추방되거나 시민의 권리를 법에 따라 제한 당한다. 천국 시민의 특성과 자격을 선포한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도 십계명의 중요성과 의의를 확대하였음을 주목할 것이다(마5:7-40, 7:12-27).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성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면서도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은 사람들이 허다하지 않은가? 그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비롯한 노독들이 일부다처(一夫多妻)의 관습을 따랐음을 본다. 그랬기 때문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축첩(蓄妾)이 죄가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이혼 등 이러한 도덕적 표준들에 의하여, 예수께서는 그 세대의 완악함과 어두움을 지적하신 후에 성경의 원칙을 제시하시고,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19:3-10)고 단언하셨다.

 

성경은 각 시대의 각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받은 빛이나 특권에 대하여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마11:20-24, 25:24-28; 요9:39-41; 룸2:12-23). 사도 바울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음을 상기시키고 “이제는 어디든지”라는 표현을 통하여 심판의 시의성(時宜性)을 강조했다(행17:30.31). 그것은 또한 계시록에 나타난 심판의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며 (계14:6-12), 로마서에 제시된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을 강조한 심판의 문화적 배경이기도 하다.(롬2:1-12)

 

심판의 표준인 십계명

여하튼 안식일을 포함한 십계명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은혜로 거저 베푸신 구원에 대한 인간의 반응인 믿음의 진실한 여부를 드러내는 열매, 곧 행실(마7:16-21)을 심판하는 표준임에는 틀림없다(약2:8-13). 십계명의 기능은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롬3:20),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게 된 사람을 죄로부터 보존하여 거룩하게 하는 성화(聖化)의 방편이요, 표준이 된다(롬7:7,13). 특별히,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즐 알게하려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겔20:12)음을 주목해야 한다.

 

마지막 심판에서 (계14;6-11), 의롭게 서게될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특성이,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계14:12)라고 명시된 것도 그 까닭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심판은 믿음의 결과인 행실(行實)을 판별하는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마16:27; 계22:12).

 

그러므로 안식일을 비롯한 십계명을 비평하려 할 때는, “자유의 율법(십계명)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2:12)는 권면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약2:9)는 기능과 불변의 권위를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롬3:31)운다는 사실을 복음의 구조에서 이해해야 한다.

posted by Yaac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