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리나요?
양은 울타리를 좋아 한다
양은 목자가 쳐 놓은 가시나무 울타리 속에서 거하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양은 자신을 가두어 놓은 울타리에 대해서 불평하는 대신에 오히려 고마워한다. 양은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경건하게 보존해 주는 울타리인 율법과 계명을 결코 무겁거나 귀찮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양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쾌락을 포기하라는 율법과 계명의 요구를 귀찮고 얽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쩐 일인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면, 자신의 인생이 바짝 마른 모래사막처럼 변할 것이라고 불평하는 소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쩐 일인가?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워 놓으신 울타리 즉 십계명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늑대의 본성에 지배되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늑대에게 양과 같은 생활을 강요할 때에 늑대는 얼마나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겠는가!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한 늑대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책망을 기록하고 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사 30:8).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의 의미
우리는 가끔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더 이상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견해인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할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공공연히, 의식적으로, 고의적으로 범해도 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한 내용 전체를 다시 잘 살펴보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어린아이라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율법이 폐해졌다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의 뜻을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바울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을 한 다음에 “그런즉 어찌하리요?”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라는 말이다.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법을 범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은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표현 방식을 사용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법을 범해도 된다는 면허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바울에 따르면 율법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것은 거룩하고 선하다. 율법은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의 표준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늘 정부의 영원한 원칙들을 드러낸다. 그것은 선과 악을 규정짓는다. 로마서 7:7에 지적하기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하였고, 로마서 3:20에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다. 율법의 기능은 도덕적 행동에 관한 하나님의 표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 표준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의 죄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바울은 그 사실을 이보다 더 명백하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율법을 없애는가? 일반적인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다고 대답할지 모르나 사도는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말로 이 문제를 매듭짓고 있다.
그렇다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로마서 3:19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아노니 이제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을 “심판 아래” 있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율법을 범함으로써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자신의 힘과 능력과 자신의 행함의 공로를 통하여 자신을 구원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뜻하였다. 바울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지 않았는가!(롬 3:23-28) 바울에 의하면 두 가지 제도 즉 “율법 제도(law system)”와 “은혜 제도(grace system)”가 있다. 율법 제도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붙잡을 수 없는 표준을 제시한다. 은혜 제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과거에 대한, 용서와 현재를 위한 능력을 동시에 제공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의 능력 아래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생애를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율법에 순종하는 승리의 생애를 살기 때문에,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고의적으로 계명에 불순종하지 않는다(여기서 고의적인 불순종이란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지적으로나 양심적으로 분명하게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을 말함).
하나님의 은혜는 안식일 계명을 순종할 필요를 없애는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덕질 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들을 없앨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일 은혜로 구원을 받은 죄인이 즐거이 십계명의 아홉 계명을 준수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그 사람은 나머지 한 가지를 포함한 열 계명 모두를 주님께 대한 순종의 표시로 지키지 않겠는가?
은혜로 말미암는 순종의 비결
이제,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비결을 연구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 바울은 율법을 지키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비결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 절을 지적하면서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돼! 계명은 더 이상 필요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사랑과 죄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있으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때문에 죄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만약 사랑이 우리의 생애의 모든 동기와 사상과 행동을 지배한다면 우리는 율법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를 아내로 얻을 수 있는 조건으로 7년이라는 긴 기간을 그녀의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기로 약속했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그분의 말씀과 진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며, 우리의 모든 애정이 그분을 중심으로 쏟아지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최고의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겠는가? 더욱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신 그분의 사랑과 희생을 생각할 때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나 위험한 일일지라도 기꺼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십계명에 순종하는 행위는 마음속에 있는 순결한 사랑의 뜨거움을 드러내는 증거에 불과하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드는 강력한 능력이다. 바로 이러한 사랑이 죄인의 마음에 새겨지도록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구원에 대해서 “너희가 은혜로 인하여 …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엡 2:8)라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사랑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온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4).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된 10개의 계명(십계명)을 4개의 글자로 줄인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하라.”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인 십계명을 친히 두 개의 돌비에 기록해서 주셨는데, 첫째 돌비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사랑이 4개의 계명으로 나누어져 기록되어 있고, 둘째 돌비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 6개의 계명으로 나누어져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첫째 계명), 우상을 만들지도 않을 것이고(둘째 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도 않을 것이며(셋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킬 것이다(넷째 계명). 또한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에 대한 나머지 여섯 계명을 자연히 순종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온 율법”은 “사랑하라.”는“한 말씀”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마음 속에 참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어떤 신학과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이 일어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학생: “교수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알고 계십니까?”
교수: “그럼, 잘 알고 있지.”
학생: “그렇다면, 교수님은 교수님의 아내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하루에 몇 번이나 결심하십니까?”
교수: “나는 전혀 그런 결심을 하지 않는다네.”
학생: “그러면 아내의 물건을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십니까?”
교수: “어렵지 않기에 전혀 노력하지 않고 있지.”
학생: “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날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교수님의 아내에 대한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서 전혀 노력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어렵지도 않다고 대답하셨는데,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 냈습니까?”
교수: “나는 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일세.”
이 간단한 예화야말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죄의 기초는 자기를 사랑하는 데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자아를 부인하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어떤 경우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다. 사랑은 모든 친절과 관대함의 근원이며 희생의 원동력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서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의 마음에 새겨지게 될 때, 죄인은 드디어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지게 된다. 누가 또는 무엇이 사랑을 소유한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할 수 있는가?
새 계명에 대한 오해
아마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으므로 율법이나 십계명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는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새 계명이라는 이름은 이전에 없었던 것이 새롭게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기독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오해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수께서 초림하시기 수천 년 전부터 구약 성경 속에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라는 율법의 참된 정신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리고 그 의미를 왜곡함으로써 까다로운 율법주의자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유대인들이 당신의 법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오해를 풀어 주시면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분께서는 사랑이야말로 당신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는 열쇠라는 사실을 아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의 공중 봉사 사업을 시작하는 첫 설교로써 사랑과 자비와 온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산상 수훈을 발표하신 것이었다. 당시에 그리스도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크게 놀랐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들이 그동안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것과 크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에 대한 오해를 풀어 주고, 계명을 진정으로 지키기 위한 비결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당신의 율법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주셨던 것이다. 계명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해석이 유대인들에게는 새로운 것으로 들렸을 뿐이다.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는 비결인 사랑을 강조하는 말씀을 전하자,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신다고 비난하였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그러한 비난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단호하게 부인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다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예수께서 사랑을 강조하셨던 이유는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와 그 근본정신을 완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이 성경 절에서 증명된다. 그러나 계명에 대해서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성경 절을 지적하면서 십계명은 폐하여졌다고 여전히 고집할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또 다른 성경 절을 찾아보기로 하겠다. 예수께서는 다음에 나오는 성경 절에서 율법과 사랑을 잘 조화시켜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서, 십계명의 첫 번째 돌비에 기록된 첫째부터 넷째 계명의 요약이 아닌가? 또한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두 번째 돌비에 기록된 사람에 대한 계명들의 요약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성경 절의 끝에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랑을 강조하는 새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구약 시대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요약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예수께서는 진짜 양과 거짓 양을 구별하는 판단 기준으로써 다음과 같은 단순하고도 명백한 말씀을 남겨 두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부인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인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자신의 노력과 공로를 자랑하는 남편이 어디 있겠는가? 마음속에 있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치는 것을 누가 막으랴! 하늘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난 후, 누군가 "수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천사들은 "우린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한 것일 뿐인데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랑은 그분을 위하여 찬양하게 만들고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드리도록 만든다.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나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켰습니다. 주께서 오실 때에 저의 공로를 기억해 주셔서 저를 구원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들은 하나님의 표정은 어떠하실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는 것은 공로도 아니며 희생도 아니다. 그것은 숨길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를 아는 자들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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