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대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은혜는 바로 믿음이라는 통로를 거쳐 개인에게 적용됩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믿음의 주제는 너무나 중요하므로 잘못된 이해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현재 많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통상적으로 가르쳐지며 용납되고 있는 믿음의 교리에 대해 지극히 염려스러운 마음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믿음에 대해 많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강조되고 있는 이 믿음의 개념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우려를 자아내게 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그에 상당한 영적인 열매가 부재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 믿음이 순종의 대체물로, 현실도피의 한 방편으로, 나약한 성품을 위한 은신처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과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함을 뜻합니다. 사실 이 반응조차도 영혼의 마음을 먼저 움직이는 성령의 역사함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믿음은 참회하는 영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정말 큰 기적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영혼에게 주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행위를 이끌지 못하는 요즘 남발되고 있는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요 그 출처가 전혀 다른 이질적인 그 무엇임이 분명합니다.
믿음과 도덕성은 같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정말이지 믿음의 본질이 도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하는 믿음이 그 고백자의 삶을 자기 주인인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력한 믿음이며 종국적으로 그러한 믿음의 소유자를 멸망에 빠뜨리고 말 것입니다.
믿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온갖 지식적, 심리적 곡예를 부리며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자세는 진정한 믿음의 부재를 나타내 보이는 명확한 증거일 뿐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야만 하는데, 그분은 이러한 믿음을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 참된 순종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회개라는 것이 단순히 과거에 범한 잘못과 죄들에 대한 슬픔만이 아니라, 회개하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한 그분의 뜻을 이행하려는 결심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오랜 교회의 역사를 통해 변질된 신학을 주입시켜 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듯 언변을 늘어놓지만, 그 예수님이 직접 행함으로 모본을 보이시고 가르치셨던 성경 진리의 중요성을 온갖 궤변으로 감소시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인도하기 보다는, 그 주장하는 논리를 따라가 보면 파멸로 이끄는 넓고 안일한 불순종의 길로 이끄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처럼 믿음과 순종의 직접적인 관계를 인식하게 되면, 믿음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예수님을 높이는 듯 많은 말들을 침을 튀기며 늘어놓지만 사실은 그 예수님을 사단에게 입맞춤으로 팔아넘기려는 종교적 장사꾼들을 쉽게 식별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율법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자신의 힘으로 계명의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노예 정신이지요. “내 자신이”, “그리스도의 도움 없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려는 노력, 바로 이것이 율법주의의 정의입니다. 이러한 정의를 접하면서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도움 없이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것이 율법주의라면,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을 율법주의자로 취급하면서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율법주의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둘째,
율법주의는 행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동기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기 자신의 힘에 의존해서 자기 혀를 다스리려는 사람은 율법주의자 이지만, 이 똑같은 말조심을 그리스도의 도움에 의존해 성사시키는 성도는 율법주의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 둘에 있는 차이는 그들의 동기이지 밖으로 나타나는 행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행위를 그리스도의 존재가 없는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함부로 매도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고 올바르지 못합니다. 인간의 안목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동기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커다란 문제는 “그리스도의 도움 없이 인간의 힘에 의존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자세”를 율법주의로 정의하는 것이 아닌, 그 어떤 동기에서 유래하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그 자체를 율법주의로 규정하는 곡해된 개념이 기독교에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죄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설상 그리스도의 능력의 도움이 있더라도 절대로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율법주의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더럽혀지지 않은 삶을 살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로 정죄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닮으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높은 표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주의자가 되고 저질적인 생활을 사는 기독교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조는 “율법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안식일을 조금씩 범한다.” 혹은 “율법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간음도 조금씩 하련다.”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이 가능해 지도록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 없이 안식일을 바라보고 복음 없이 그날을 성별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의 구전 율법인 미쉬나(Mishnah)에 기록된 39개조 안식일 준수 법을 해석하여 수많은 시행 세칙들을 만들고 문자 그대로 마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의 무수한 전통적인 규제들과 무의미한 제한들에 의하여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짐이 되게 하였으며, 조금도 기쁜 것이 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막 2:27)이라는 혁명적인 선언을 하시며 당신의 생애와 가르침을 통하여 안식일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명상하며, 자애와 자선을 행하는 날로서 그 합당한 자리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사실 이러한 선언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혁명적 선언이었는지 모르지만 안식일의 제정자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는 곧 “안식일의 본질 회복 선언”이었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준수”하면 “토요일”만 지키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준수는 날짜를 지키는 것 이상을 포함합니다. 진정으로 안식일을 준수하는 경험은 창조에 관한 사실을 인정하고 시간을 구별하는 것만이 아니라, 종 된 상태에서부터 해방시켜 주신 구원의 표라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입니다(신 5:15).
성경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롬 6:16) 이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죄의 종 된 상태는 애굽의 종 된 경험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노예에서 해방된 기념인 것처럼, 우리에게도 안식일은 “죄에게서 해방”(롬 6:18)되어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날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세상을 창조하신 분”과 “죄를 정결케 하는” 분으로 언급하고(히 1:1~3),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구속은 곧 창조이며 안식일은 구속과 창조 모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날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극치입니다. 이와 같이 안식일은 우리를 거룩케 한다고(출 31:13; 겔 20:12,20) 약속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언약(출 31:16)이며 하나님의 인입니다(계 7:2).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의 삶 속에서 창조적인 권능이 결과를 맺지 못한다면 그날은 결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죄는 안식일의 쉼을 빼앗아 갔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맞이하면서,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는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회개와 용서로 잃어버린 평안을 찾게 되며, 거룩한 시간 속에서 예수의 형상을 닮은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매 주 안식일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참된 성결을 경험하고 시간의 거룩함과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것은 시간의 지성소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았을 때 안식일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었습니다. 사단은 안식일을 왜곡시키려고 활동하는데 그 이유는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능력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안식일을 무거운 짐이 되는 요구 사항들로 둘러싸서 사단의 뜻을 성취시켰습니다. 그리스도 시대에 안식일은 매우 왜곡되어서, 랍비들은 사실상 사람들이 순종할 수 없는 율법을 주신 분으로 하나님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폭군처럼 여기게 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안식일의 준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잔인스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런 그릇된 관념을 없애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이었습니다. 랍비들이 무자비한 적개심을 품고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안식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을 지키시면서 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폐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안식일을 범하셨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그들은 실상 트집 잡던 유대인들이 하던 것과 똑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노라”(요 15:10)고 말씀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증언을 모순되게 만듭니다. 구주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안식일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십계명의 산 표본이셨습니다. 그의 생애 가운데 계명의 거룩한 명령을 범한 일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정죄하려는 기회를 찾던 증인들을 바라보시면서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고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우리의 모본입니다. 우리도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고 주의 법이 우리 심중에 있게 해야 합니다(시 40:8). 그것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지식이 거룩한 생애를 살게 해 주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보다 더 좋을 때, 죄가 싫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가장 중요한 관점은 내 마음가운데 있는 칭의(稱義)의 경험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바 되어(롬 5:5)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의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믿음을 공언하는 것 이상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주시는 은혜를 의지해 죄를 극복하려는 간절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두셨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행사하여 그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은 그 능력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노력과 협력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벧후 1:4)실 것입니다.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26,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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