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장 1절-15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슈아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슈아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슈아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슈아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슈아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슈아라 하니라
중풍병이란 뇌졸중 곧 갑작스런 뇌동맥 장애로 신경과 의식에 운동 마비가 일어나 반신불수가 되거나 손발이 마비되는 병입니다. 일단 머리 속 혈관이 터지면 그 뒷부분의 뇌세포가 산소 공급에 장애를 받아 소멸되므로 실어증 증세를 보이고 만일 뇌동맥이 혈전으로 막히면 뇌경색증이 됩니다. 병이 심하면 큰 소리에 겨우 눈을 뜨는 반 혼수(세미코마) 상태가 되며, 더욱 위중하면 대화는 물론 눈 뜨는 것조차 불가능한 혼수(딮코마) 상태가 됩니다. 다행히 조금 회복된다 할지라도 손발이 부자연스럽고 말도 똑똑치 못하며 마음대로 걷거나 뛸 수가 없게 되지요. 그러므로 중풍병은 실로 참혹한 병입니다. 나의 남동생 한 명도 이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답니다.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갑작스럽게 뇌혈관이 파괴돼 그만 중풍병에 걸려 버린 한 불쌍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심령이 죄로 곪아 썩어 육신의 병을 가져온 것입니다. 병세가 아주 대단하여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서거나 걷는 것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그를 치료하고자 들것에 실어 이 의원 저 의원 갈 수 있는 곳은 다 가 보았습니다. 당대에 유명한 의사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치료하고자 애를 썼지만 낫기는커녕 오히려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가산만 탕진해 버렸지요.
친척들의 경조사는 물론 아름다운 자연계를 거닐어 본 지도 어느 덧 반생, 곧 38년을 보내었으니 그는 마치 병치레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자 같았습니다. 지난 날 치료를 받고자 애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버린 그에게 드디어 죽음의 그림자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그는 절망의 나날 속에 오직 죽을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사경을 넘나드는 처지에 있었다 할지라도 그에게 남아있던 강한 살고자 하는 의욕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꼭 건강을 회복하여 지난 38년 동안 그토록 가고 싶었던 성전에서 하나님을 뵈어야겠다고 희망했습니다. 그런 의욕 때문에 그의 가냘픈 생명이 근근히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닥 희망을 던져 주는 참으로 좋은 소식이 그에게 들려 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는데 만일 그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누구든지 제일 먼저 그 속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무슨 병에 걸렸든지 금방 낫는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허망한 전설이었다 할지라도 그 소식은 그 중풍병자에게 강한 삶의 욕구를 자극시켰습니다.
"나도 그곳에 가서 연못에 제일 먼저 뛰어들어가 건강을 회복해야겠어."
그리하여 그는 가족들에게 소리쳐 거듭거듭 졸라댔습니다.
"나를 베데스다 연못가로 데려가 달라."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하려고요?"
"어떻든지 나를 그쪽에다 데려가 달라."
성화에 못 이긴 그의 가족들은 그를 들것에 실어 베데스다 연못가로 데려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보니 치유를 기대하는 각양각색의 환자들이 연못가에 이미 진을 치고 있었으며 한결같이 모두다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별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중풍병자를 연못가에 홀로 내버려둔 채 그만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자비의 집"이라는 뜻의 베데스다 연못은 예슈아 당시의 양문, 곧 양을 파는 시장 옆에 있었습니다(요한복음 5장 2절, 느헤미야 3장 1절). 오늘날 예루살렘 성 동쪽 스테판문 안 가까운 곳에 있지요. 그러면 왜 베데스다 연못은 하루에 몇 번씩 움직였을까요? 그것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연못은 주전 2세기경 시몬 대제사장이 성전에 물을 공급하고 또 의학적 치료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헐천인 용천을 이용하여 만든 길이 약 17미터, 넓이가 약 4미터의 쌍동이 연못이었습니다.
그 연못은 기혼샘처럼 하루에 서너 번씩 솟아올라 부글부글 물이 움직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물이 사방에서 뿜어져 나와 부글부글 거리는 물리치료실인 셈이지요. 물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외국이나 한국에는 매우 좋은 수치료 시설을 해 놓고 주기적으로 환자를 받아 치료를 하는 요양원들이 있습니다.
한 때 베데스다 연못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양을 씻기던 정결탕으로 사용되었었습니다. 오늘날 그곳에 가보면 행각이 연못 가장자리에 4개, 중앙에 한 개 도합 다섯 개가 있으며, 관망대 위에서 연못의 모든 유적들을 일목요연하게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1888년 고고학자 헤르 쉬크(Herr Shick)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뛰어들면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백성들의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베데스다 연못의 용천에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헛되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무슨 병을 가졌든지 그 움직이는 물 속에 제일 먼저 뛰어들면 나음을 받는다는 허무맹랑한 소리가 퍼졌습니다. 이 황당무계한 전설 때문에 세상 의학에 절망한 불치병 환자들이 마지막 실낱같은 삶의 희망을 가지고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이 들것에 들려서, 어떤 이는 등에 업혀서 죽을 힘을 다해 이곳에 왔습니다. 연못가 행각에는 그곳에 아예 누어 있는 소경, 절뚝발이, 중풍병자, 혈기 마른 자, 그리고 날마다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각양 각색의 환자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온 수많은 사람들로 두루 섞여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요술적 치료를 믿고 헛된 기적의 소망을 안고 연못가에 와서 아예 밤을 지새우는 환자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물이 움직일 때에 제일 먼저 연못 안에 뛰어드는 것이 최대의 희망이었습니다. 때때로 물이 움직일 때에 힘이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발로 밟고 서로 다퉈 물에 뛰어들었으며 간혹 연약한 여인들과 힘없는 아이들이 물에는 뛰어들지 못한 채 밟혀 죽는 일도 벌어지곤 했었답니다. 모두다 이기적이고 경쟁에 광분해 있었습니다.
사실 연못에는 한 번도 뛰어들어가 보지 못한 채 거기서 기다리다 그만 지쳐서 죽고 마는 환자들도 많았습니다. 얼마나 애처로운 장면인가요! 하나님께서 과연 그와 같은 치열한 생사투쟁을 통해 오직 승리한 자만 치료해 주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복음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뛰어들어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려고 광분하는 것은 마치 허망한 신기루를 잡으려는 것과 다르 게 전혀 없는 것입니다.
아직 열 두 제자들을 정식으로 택하기 전 갈릴리 지역에 계시던 예슈아께서는 절기를 지키기 위해 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에 다다른 주님은 성전에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베데스다 연못가에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며 모여 있는 환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헛된 전설을 따라 그곳에 와서 치유를 기다리며 병으로 신음하는 처참한 환자들을 둘러보시고 그분의 마음은 참으로 측은해지셨습니다. 주님은 여러 환자들 중에 가족들에게서까지 버림을 받아 거기 연못가에 홀로 누어 실낱같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반신불수의 38년 된 중풍병자를 보시자마자 그만 끓어오르는 연민의 정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동안 굶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피골이 상접해 있는 중풍병자의 몰골은 참으로 기가 막힌 참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환자는 삶의 의욕 때문에 근근히 생명만 유지됐을 뿐 죽은 자와 거의 같았습니다.
가끔 물이 움직일 때 머리를 들고 훤히 바라보기는 했지만 자력으로 먼저 물에 뛰어든다는 것은 그에게 턱없는 환상에 불과했습니다. 자기보다 힘센 자들이 먼저 뛰어들곤 한 것이지요. 실망을 거듭한 중풍병자는 그만 삶의 의욕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생애의 벼랑 끝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내 인생은 이제 끝이야. 마지막 한 가닥 치유의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어."
중풍병자는 점점 깊은 좌절의 늪을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아, 이게 웬 일인가! 어떤 사람이 자기를 환한 얼굴로 굽어보며 치유의 소망을 일깨운 게 아닌가!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의 비참한 생애를 꿰뚫어 보시던 주님께서 다 죽어 가는 그에게 그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참으로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저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마태복음 12장 20절) 긍휼과 자비로 충만한 음성이었습니다. 중풍병자는 너무나 자명한 질문에 단순히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만 하면 될 것을 주님의 뜻을 간파하지 못하고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기진맥진한 채 대답했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여전히 헛된 연못의 치료를 기대하던 그는 자기를 물에 밀어 넣어 줄 사람이 생겨 꺼져가던 삶의 의욕이 되살아나며 병나음에 대한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낫기를 원하오니 여기 계시다가 저 물이 움직일 때 나를 제일 먼저 집어 던져 넣어 주십시오. 힘이 없으면 발로라도 차서 밀어 넣어 주십시오. 나는 지금 이판사판입니다. 그냥 이곳에서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아무튼 제일 먼저 밀어 넣어 주십시오." 라고 한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연민이 넘치는 질문을 하신 분이 바로 만병의 의원이신 예슈아인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중풍병자가 허망한 전설을 믿는다고 꾸짖지 않으셨으며 또한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활용하도록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측은히 여기사 병의 원인인 죄를 용서하시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치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은 중풍병자는 즉시 순종하여 일어나려고 애를 썼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토록 오랫동안 마비됐던 모든 신경과 근육이 정상으로 발동하더니 사지에 힘이 생기는 게 아닌가! 그는 벌떡 일어나 꼿꼿이 섰습니다.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고 기뻤습니다. 38년간이나 반신불수로 지낸 무기력한 중풍병자가 마쉬아흐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에 의지하여 곧장 일어난 것입니다. 완쾌되었다고 느껴질 때까지 기다린 게 아니라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의지하여 말씀대로 일어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치유를 일으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중풍병자는 영적 및 육적 치유를 받았던 것입니다. 건강하게 된 그가 허리를 구부려 자리를 둘둘 말아 들었을 때 이미 자기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사와 찬양이 폭죽처럼 터져나와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으며 너무나 기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에 자리를 들고 걸으며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편협한 유대인들은 다 죽어 가던 병자가 기적적으로 치유 받은 것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안식일에 이부자리를 들고 걸어간다는 사실에 더 관심을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세칙에 의하면 안식일에 환자가 누어 있는 침상은 운반할 수 있었지만 환자 없는 침상을 운반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고의로 안식일에 공중 앞에서 자기 집으로 무슨 짐이든지 들고 가는 자는 돌로 쳐죽일지니라."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왜곡해서 축복과 기쁨의 날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하는 멍에의 날이 되게 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옷에 바늘 하나를 꼽고 다녀도 짐을 운반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핀도 결코 가슴에 달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이 그들 눈에는 얼마나 큰 죄로 여겨졌겠습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 사람을 보고 힐책했습니다.
"왜 안식일을 범하느냐?"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고침을 받은 자는 안식일에 치유 받은 것과 침구를 들고 가는 것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계속 질문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자기를 고쳐준 분이 누구인지 그때까지 정확히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침을 받은 것이 너무나 고마워 집으로 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38년만에 올라가게 된 성전이었으니 얼마나 기뻐 감격했겠는가! 뜰에서 성전으로 막 뛰어 올라가는데 조금 전 환한 얼굴로 굽어보며 자신을 치유해 주신 바로 그분과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제서야 비로소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예슈아이신 줄 알게 됐고 너무나 기뻐 마구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분이 38년간 중풍으로 누워 있던 저를 고쳐 주신 분입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고픈 마음으로 간증했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그만 예슈아께서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반감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공개적으로 핍박을 받게 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 돼 버렸습니다. 예슈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목질시가 더욱 심화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라고 하신 예슈아의 말씀은 죄가 육체적인 병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죄의 용서와 육체적인 치유 사이에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병이 다 나았다고 또다시 허랑방탕하면 더 심한 병에 걸린다는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38년간이나 불치병으로 고생하던 환자가 신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무었이었을까요? 이 치유 사건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두 가지 긍정적인 요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만약 그 원리들을 자신의 생애에 똑같이 적용해 본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의 치유를 체험케 될 것입니다.
첫째, 중풍병자가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은 그가 삶의 의욕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38년간이나 병으로 신음했었지만 그는 삶에 대한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아니했고 어떻게 해서라도 병든 몸이 꼭 나아야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38년간을 버틸 수가 있었으며 치유를 위해 베데스다 연못가에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언 18장 14절)라고 했습니다. 환자의 치료에는 꼭 살아야겠다는 삶의 의욕이 아주 중요한 것임을 주지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하여 삶의 의욕을 포기하면 환자는 결국 고침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꼭 나아야겠다는 삶의 강한 의욕이 마음에 있을 때 그 환자의 치유는 분명히 가능해집니다.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그에게 꺼져 가던 바로 그 삶의 의욕에 다시 한 번 불을 붙이신 것입니다. 결국 긍정적인 강한 삶의 의욕이 중풍병자에게 있었기에 신유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환자에게 "내가 죽지 않고 다시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시편 118장 17절)라는 긍정적인 의욕이 있을 때 주님의 치유가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중풍병자가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두 번째 요인은 의심 없는 믿음의 활용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다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명하셨을 때에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순종하여 일어서려고 애를 썼습니다.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생명력이 38년간이나 마비됐던 모든 근육과 신경에 부여돼 불구가 됐던 사지가 운동을 시작하여 결국 제 발로 꼿꼿이 일어섰을 뿐 아니라 즉시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8년간이나 병상에서 누어지냈지만 예슈아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기가 완전하게 나았다고 믿고 걸어가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행사 바로 그것이 신유를 체험하게 된 두 번째 동인이었습니다.
예슈아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중풍병자에게 최선의 노력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일어나라고 했을 때 의심하고 "내가 일어날 수 없는데 일어나라 하다니"라고 투덜댔다면 그는 일어나지 못하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치유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협력으로 가능해집니다. 오늘날도 병든 몸이 낫기를 원하는 자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순종 없는 믿음이란 아주 가식적인 믿음입니다.
"내게 돌이키라." "새 마음을 품으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등의 하나님 명령에 우리가 즐겨 순종하는 것은 사실 그분과 협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협력 없이는 우리가 그분의 치유의 은사를 결코 체험치 못할 것입니다.
나는 오늘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가셨을 때 성전에 올라가시기 전 먼저 38년간이나 비참한 삶을 살아온 버림받은 한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시기 위해 직접 찾아가셨다는 사실에서 무한한 감명을 받습니다. 연못가에 누어 절망한 채 삶을 거의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시므로 삶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일으켜 주셨고 결국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근본적 원인은 순전히 먼저 그를 찾아가신 주님의 자비와 동정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동정심 많으신 그분은 병들어 버림받은 외로운 자를 제일 먼저 찾아가시어 친구가 되시고 조력자가 돼 주십니다.
예배당 층계 앞에 휠체어와 함게 넘어진 장애자가 예배시간에 늦어서 바삐 뛰어오는 한 신자를 보았습니다.
"여보세요. 저를 좀 도와주세요." 그러나 신자는 손목 시계를 보더니 아주 다급하게
"죄송합니다. 예배 시간에 늦어서 안되겠군요."
그렇게 짧은 대답만 던지고는 예배당 앞 층계를 휑하니 올라가 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장애자를 내버려두고 성전에 먼저 올라갔지만 주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기 전 먼저 수족을 제대로김 쓰지 못하는 중풍병자에게로 가셨습니다. 아무런 초청도 없었지만 그분은 자원하여 연못가에 누어 있는 버림받은 환자를 찾아가셔서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동정심 많은 주님의 그 자비와 사랑을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를 직접 찾아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으셨던 주님께서 오늘날도 병들어 사경을 헤매는 외로운 자들의 병을 치유해 주기 위해 찾아오시며 버림받아 소외된 자의 삶의 현장에 위로와 용기를 주시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병들어 외롭게 누어 있는 환자들을 보실 때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연민의 정을 억제할 수 없으시며 분명히 그분의 치유의 손길을 펴실 것입니다. 비록 사경에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라 할지라도 신유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삶의 의욕을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상한 갈대를 꺼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 하시는"(마태복음 12장 20절) 마음으로 그분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치유를 간구하며 성경의 중풍병자처럼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으로 일어서면 분명히 신유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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