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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믿고 가르치며 예슈아 마쉬아흐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Yaacob

'지성소'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4.02.10 성소에 대하여
2014. 2. 10. 17:45 외솔/시대의 길잡이

성소에 대하여

오늘은 지상에서의 예슈아 마쉬아흐의 사역을 나타내는 성소와 그 제도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성소에 대한 이해

성소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길이 열려 있습니다.  또한 그 길은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슈아 바로 그 분이십니다. 이 길은 “예슈아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신 그 길입니다. 창세전에 시작되어 지금도 온 인류를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이 놀라운 구원의 가르침인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20)고 하신 그 길입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 모두가 정확하게 배우고 깨달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속히 오라는 주인님의 초청을 깊이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라며 함께 성경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제사와 성소 봉사

제사 드리는 일은 에덴에서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계속되어온 일입니다. 제단의 뿔들에 바르거나 휘장 앞에 뿌리거나 지성소의 법궤 앞에 뿌린 피는 계속적이고 상징적인 봉사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죄와 제사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절실히 느끼게 합니다. 희생 제물을 드리는 자가 죄를 고백하면서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매일의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봉사하는 제사장 직분의 제도를 통하여, 특별히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드리는 대속죄일(Yom Kipur)의 의식을 통하여 죄의 용서와 중보, 화목과 구속의 원칙들이 전수되어 왔습니다. 이 모든 의식과 교훈들을 통해 우리들은 우리의 죄를 친히 지시고 돌아가셨으며 그분의 매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게 된 예슈아 마쉬아흐의 중보에 대하여 깨닫게 됩니다.

 

성소 봉사는 분명히 상징적이었고 일시적이었음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수송아지나 염소의 피와 죄의 용서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희생제물들은 모두 표상적이었으며 그 희생 제물 자체에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장차 올 더 좋고 나은 것의 예표와 그림자가 되었으며 중요한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죄의 심각성, 자복의 필요성, 율법의 위대함, 하나님의 거룩함,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필요한 준비, 이렇게 중요한 실제적인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될 때 이 깨달음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성소를 세우신 목적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해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넌 후 부른 그의 노래에서 말하기를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출 15:17)라고 했습니다. 이로 보아 모세는 이 성소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사셨던 예슈아의 이름 또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 1:23)이 아니셨습니까!

 

지상 성소의 원형인 하늘 성소(히 8장 참조)에서 인류를 위하여 하고 계시는 마쉬아흐의 중보 사업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십자가 사건과 함께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여 하늘에서 완성하실 일도 그분의 죽으심으로 시작되었기에 그러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신”(히 6:20)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골골타(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나온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비치는 이 빛, 바로 칭의는 하늘 성소에서의 마쉬아흐의 중보 사역을 깨달음으로 성화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그곳을 통해 구속의 신비를 더욱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하루의 삶을 성소와 더불어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성소를 중심으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소를 무엇으로 어떻게 지으며, 어느 때에 어떻게 섬겨야 할 지를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이 성소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것이 이 시대의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일인지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이 빛은 예슈아를 통해 더 크고 환한 정오의 빛으로 지금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이 빛을 통해 우리는 현재 예슈아께서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시는 기도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진과 함께 계신 예슈아 마쉬아흐

성막 주위로 질서 있게 배치된 백성들의 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각 시대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그들이 그분의 백성들로 살아가게 되기를 바라는 모본으로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단 하나의 예배로 결속되어 있었으며 단 한 분 하나님과 하나의 위대한 희생 제물과 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모두를 위한 한 가지 목적과 모두가 바라고 있는 약속의 땅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활했던 광야는 시선을 끌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이었으며 그들의 주위에는 늘 그들을 위협하는 다른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둘러싸인 조용한 곳이 있었으며 그 중앙에 예배하는 장소와 하나님의 보좌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삶의 중심에 계신 마쉬아흐(성소)로 말미암아 그들은 주위의 환경, 즉 죄의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계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사면이 둘러싸인 성소의 뜰과 상징적인 기구들, 희생제물과 절기들을 통하여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리를 계시하는 도구로 성소를 위한 모든 설계도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계시의 중심은 구주의 중보와 봉사를 친히 대표하는 대제사장의 역할이었습니다. 히브리서를 통해 바울은 성소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마쉬아흐께서 때가 되면 하늘 성소에서 인류를 위하여 탄원하는 중보자와 심판자로서 서게 되실 것과 또한 그분의 생명을 주는 보혈을 통한 전능하심이 모든 회개하는 영혼을 사탄의 속박과 영원한 사망에서 놓여나게 하신다는소망을 당신의 백성들 앞에 계속적으로 제시하기 위하여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의 매일의 삶의 중심

광야에 머무는 동안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장막이 어느 곳에 설치되든지 바로 그들의 진영 중앙에 성막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성막의 경내는 그들의 모든 세속적인 활동과는 분리되어야 하였으며 성막을 거룩한 울타리로 둘러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장막은 넓은 공간의 주변에 치도록 하셨으며 이곳에서는 아무런 세속적인 일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이 광장 안에 훨씬 더 작은 지역이 성막의 “뜰”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계획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곳은 그분의 정부의 중심임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행군시에그들은 언약궤로부터 일정한 간격(2,000규빗)을 두고 행진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수3:4). 중앙에 있는 성막과 더불어 백성들은 죽지 않도록 “성막 주위로부터 떨어져 있어야”(민 2:2 참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한 당신의 백성들과 가까이 있기를 갈망하실지라도 그분께서는 오직 당신의 거룩한 위엄과 그들의 연약한 죄된 본성이 허락하는 만큼만 가까이 있을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의 계획이, 인간과 친밀하게 되기를 구하실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영원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백성들 앞에 항상 제시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셨습니다.

 

죄의 환경으로부터 분리

여호와께서는 그분께서 에덴동산에서 하셨던 것처럼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창 3:8)가 진중에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이 거룩한 구역은 진영 전체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정결하게 보존되어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기에 그들 모두는 그 자신과 주변을 정결하게 보존할 신성한 책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의무에 부주의하거나 게을리 해서는 안 되며 모든 생활면에서 청결을 유지하여야 했습니다. 단정치 못한 것이나 건전치 못한 것 곧 순결한 분위기를 더럽힐 그 어떤 것도 그들과 그들의 주변에 허락지 말아야 하였습니다.

 

성막의 뜰과 오직 하나의 문

뜰을 두르고 있는 것은 세마포로 만든 세마포 휘장입니다(출 27:9). 성경에서 세마포는 구주의 “의”를 상징하며 예슈아 마쉬아흐께서는 그것을 그분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성막을 두르고 있는 이 세마포 휘장을 통해 들려오는 성령의 음성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간곡한 초청의 음성이셨습니다. 이 뜰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막 동쪽 편에 나있는 하나의 휘장으로 된 문 뿐이었습니다. 이 문은 “천하 인간”(행 4:12)에게 주신 구원을 위한 단 하나의 문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오직 하나의 문이며(요 10:7~9), 우리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히 12:2) 바로 그분이십니다. 백성들의 뜰로 불리워진 뜰의 동쪽에서는 세 가지 중요한 의식들이 행하여졌습니다. 번제단 불은 희생 제물을 살랐으며, 대야의 물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였고, 희생의 피는 잃어버린 자를 구속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의식들은 죄를 제거하고 칭의를 얻기 위하여 행하여지고 있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성막은 네 개의 황금 기둥에 매달린 휘장에 의하여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성막의 바닥은 마른 땅이었습니다. 주께서는 당신의 겸비하심에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하여 땅 가까이에 그분의 성소를 세우셨습니다.

 

성막의 운반

성막은 쉽게 해체하고 다시 세울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40년 광야 생활 동안 성막은 50여 곳에서 해체되고 세워졌습니다. 낮에는 서늘한 구름과 밤에는 따뜻한 불로써 하나님께서는 언제 출발하고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를 백성들에게 지시하셨습니다. 어떻게 누가 성막의 기구들을 운반하는지에 관해서와 열두 지파가 행진하는 정확한 순서도 직접 정해 주셨습니다. 구름이나 불기둥이 멈추는 곳은 어디든지, 언제든지 간에 그곳에 정지하여야 하였습니다. 참으로 거대하시지만 또한 세밀한 분이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을 바라보면서 성막을 세우고 뜰을 측량하고 거룩한 광장을 정하고 끝으로 레위인들과 열두 지파의 위치를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움직이고 행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 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이 시대의 우리의 삶에 세워진 모든 계획들도 마쉬아흐의 거룩하고 치밀한 계획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성소에 대한 주제의 중요성과 연구 방법

우리들은 성소에 관한 문제를 분명하게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슈아의 현 위치와 시대 시대마다 행하신 예슈아의 사역(칭의, 성화, 영화)을 깨달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빛에 비추어서만 우리들은 우리의 실체를 눈으로 보고 알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들은 이 시대에 필요한 믿음을 활용하는 일에 큰 부족이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우리의 위치를 찾지 못하게됩니다. 지상 성소와 하늘 성소(히브리서 참조)에 관한 문제들은 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아주 중요한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이 가까운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다른 어떤 시대의 사람들에게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 문제를 충분히 연구하고 깨달아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능히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진술

바울은 예슈아의 죽으심과 하늘 성소에서의 승리의 봉사를 히브리서를 통해 생생하게 진술하였습니다. 이 일은 그가 지상 성소에 대하여 충분히 익숙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쉬아흐께서 지상 성소의 표상들을 이행하신 일에 대한 그의 진술은 오로지 구약을 통한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분명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의 진술들은 먼저 있은 구약의 빛으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구약(지상 성소)과 신약(하늘 성소)을 통해 모아진 가르침들은 성소를 통해 전해 주고자 하는 구원의 계획을 밝히 비춰주는 큰 빛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슈아 마쉬아흐

예슈아께서는 시험을 받으시기 전후에 침례 요한에 의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두 번씩이나 언급되었습니다(요 1:29,36). 아무 이유 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가는 어린 양의 모습을 마음에 그려 보십시오. 그것은 어떤 의미를 우리 마음에 불러 일으킬까요? 하늘 아버지께서 세상을 위하여 죽도록 내어 주는 부드럽고 친절한 우리 구주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제 우리는 성소를 연구함에 있어 이런 거룩한 상상력을 모든 표상과 상징들에게 적용시켜 볼 것입니다. 이 거룩한 상상력을 통한 연구는 우리들을 현실적으로 성소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경험케 합니다. 모세와 이사야와 우리 구주께서는 희생제물인 어린 양에 대해 세밀한 주의와 관심을 돌리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모든 종류의 희생제물에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은 순결하고, 어리고, 흠이 없어야 하며 “천산의 양떼”의 주인이신 큰 소유주에 의해서 값없이 제공된 것이어야 합니다. 어린 양은 자발적으로 죄를 뉘우치는 자에 의해서 제단에 바쳐졌으며 그는 그것을 줄로 묶어, 땅에 내던져, 진흙 속에서 그의 온 무게에 짓눌리게 합니다. 그런 다음 신중하게 그의 무력한 대속물을 도살합니다. 우리들이 도살하는 칼날 위에 태양의 번쩍임을 인식하게 될 때, 그리고 그 몸서리치는 죽음의 고뇌와 목구멍으로부터 흘러내리는 피를 목격하게 될 때 우리의 거룩한 상상력은 우리들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어린 양이신 예슈아 마쉬아흐를 어떻게 취급하였는지에 대해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줍니다. 이처럼 성소의 표상과 상징들 속에 깊이 새겨진 사상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어린 양에게 행하는 실체를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상상력만이 요구되어 집니다

이 같은 마음의 상상력은 성경 기자들의 펜에 의해서만 나오지 않으며, 그런 감정 또한 그들의 말만 가지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기록된 문자보다도 훨씬 더 힘있고 웅변적인 표현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감동을 불어 넣어주어야 일어나게 됩니다.

 

 

성경의 사상들은 실제적으로 내 안에서 구체화 되어져야 합니다

밝게 비춰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모든 구체적인 사항들이 마음속에 새겨지기까지는 우리들은 하늘 성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일례로, 희생제도의 의미가 밝히 드러나게 될 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사상이 실제로 우리들의 가슴을 저미도록 아프게 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의 죽음을 죄 없는 희생제물이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죄를 포함해서 세상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무죄하신 구주께서 우리 때문에 골골타에서 고통 중에 돌아가셔야 했다는 사실이 우리 마음에 실제적인 사건으로 각인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골골타에서 보여진 큰 사랑을 느낄 때에 실제적으로 우리의 죄가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흔들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죄를 가증하게 여기게 되지요.

 

 

마쉬아흐인은 성막을 척량해야 합니다

예슈아께서는 인류의 진정한 모본이시며 그분의 자아 희생적 삶은 우리 삶의 모본이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 모본이 거의 연구되어 지지 않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생각이 깊은 신앙인이라면 건물과 기구와 제사장 직분과 의식과 같은 사건들 너머로 구주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시 29:9)라고 외쳤습니다. 에스겔의 성전에서 하늘의 감독자가 사용하고(겔 40:3참조), 하늘 성전을 척량하도록 요한에게 전달되었던 거룩한 척량 “장대”(계 11:1,2)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예슈아께서 친히 “장대”로 불리워지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지니라”(미 6:9). 우리는 그분의 생애와 봉사를 척량자로 삼아 성소의 의미를 척량하며 우리 자신의 삶 또한 거룩한 척량자로 척량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에 의하여 단련되고, 사전과 문법과 문맥에 의하여 훈련 받고, 역사의 통찰력과 지리와 계시된 과학적 사실에 의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우리의 통찰력은 낱말의 명료한 의미를 더욱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합니다.

 

 

 

하늘 성소에 대한 이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오늘날 예슈아께서 하고 계시는 하늘 성소에서의 봉사에 대한 이해는 이 시대의 우리가 정확히 알고 깨달아야 하는 이 시대를 위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마쉬아흐께서 하늘 성소에서 제사장과 대제사장으로 봉사하고 계시며, 거기에서 그분의 속죄의 희생의 공로를 그분의 백성들의 필요에 적용시키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같은 하늘 성소의 봉사는 구약의 성막을 통하여 분명하게 예증되어 있으며 예슈아께서는 거기에 나타난 모든 상징과 표상의 성취이십니다. 우리는 이제 이 하늘에 있는 성소의 존재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살펴봅니다.

 

 

하나님의 처소인 하늘 성소

구약과 신약 기자들의 일치된 증거는 하나님의 처소는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홍수 직후에 “번제”(창 8:20~22)를 드렸습니다. 이 번제의 히브리 이름은 그들의 선물이 마치 탄원과 찬양 중에 여호와께 도달되는 것처럼 연기가 되어 “올라가고-올림”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바벨탑 건축자들의 영적 상태를 조사하기 위하여 하늘 높은 곳에서 “강림”하셨다고 창세기 11장 5~7절에 나와 있으며 소돔과 고모라의 상태를 조사하실 때도 그분께서 친히 살펴보고자 “내려오셨다”창세기 18장 16~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야곱의 꿈 이야기에서도(창 28:12~15) 높이 들린 어떤 곳에 좌정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감을 받은 시인들은 종종 “하늘의 하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늘의 하늘”은 가장 높은 곳, 바울이 “이끌려갔던”(고후 12:4) “삼층 하늘”이나 “낙원”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처소는 그곳에 위치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계심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실제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늘 보좌에서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0장 22절을 통해 주인님께서는 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욥 22:12)고 물었으며, 이사야는 “하늘은 나(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사 66:1 비교 행 7:48,49)이라는 사상을 확증하였습니다. 예슈아께서는 산상수훈 중에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마 5:34)라고 확언하셨으며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구주께서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계 3:12) 새롭게 만들어진 세상의 수도가 될 것(계 21:10)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세상 역사 마지막에 대한 묘사에서 요한은 “큰 음성이(하늘) 성전에서 나서”(계 16:17) 은혜의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요한은 마지막 날의 징조들 가운데 하나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려 지성소 안에 있는 증거궤를 모든 사람이 보게 되는 광경을 묘사하였습니다(계 11:19). 이것은 성령께서 마지막 때에 요한계시록을 읽은 독자들의 마음을 의도적으로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로 인도하고 계심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히브리어의 의미

히브리서의 연구나 다양한 영어 번역서들을 통해 우리는 “거룩하다”라는 히브리어는 지금 히브리어로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 “성소”로 번역되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20: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찌욘(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시편 20: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이러한 표현은 항상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연결되어 사용되어졌으며 율법에 기초된 보좌는 그분의 하늘 성소 안에 있고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그분의 궁핍한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계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서 경배”하라는 말씀에는 이 사상을 계시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시 29:2,9,10). 성경 난외주에 “거룩함”은 성소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선배의 조언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편 기자들은 자주 찬양하는 자들의 마음을 위로 향하게 하여 그분의 영원하신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여호와께 초점을 맞추게 하는 언어들을 사용하였습니다.

 

 

경배의 중심이며 또한 심판의 중심인 하늘 성소

다윗은 시편에서 지상 성소의 목적에 대한 그의 이해는 하늘 성소에서 행하시는 그분의 사업에까지 다다른다는 사실을 기쁘게 증거하였습니다(시편 18편 참조). 또한 시편 9편에서는 주인님께서 심판하시는 조사 절차에 대하여 탁월한 통찰력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 9:7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시편 9: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선지자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는 하늘 성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렘 17:10~12 참조)이라고 선언하였고, 미가 선지자는 “주께서 당신의 하늘 성전에서 악인에 대해 증거하시며, 당신의 심판을 실행하기 위하여 세상에 내려오시는”(미 7:7~9 참조)것으로 말함으로써 구속의 과정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늘 성소의 표상인 지상 성소

솔로몬 왕은 그의 성전 봉헌 기도에서 주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그곳으로부터 도움을 베푸실 하늘 성소로 그와 백성들의 생각을 높였습니다(왕상 8장 참조). 그리하여 솔로몬 왕은 그의 백성들의 마음을 지상 성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처소에 집중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하늘 성전의 “문”으로부터 흘러나와 이 세상의 사막으로 흘러 들어가는 치료하는 은혜의 강에 대한 이상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겔 47장 참조). 이 생명을 주는 시내는 회복과 풍부한 결실을 가져다주었으며 마침내는 달마다 열두 가지의 다양한 과실을 맺는 생명나무에 물을 대주고 있음을 에스겔 47장, 요한계시록 22장의 이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상은 또한 성소에서 예시된 대로 마쉬아흐의 봉사를 묘사하였습니다. 지상 성전의 상징적 희생 제물과 표상적 제사장 기능은 하늘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실체를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시는 마쉬아흐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 처음 일곱 장에서 모세의 성막의 교훈과 그 제사장 직분을 주의 깊이 회고하였으며 8장에서는 자신이 경험한 성소에 대한 더 풍성한 이해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슈아와 그분께서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닌 참 장막”(히 8:1,2)에서 행사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옛 언약에도 지상 성소가 있었음을 상기시키며(히 9:1) 그 성소의 제사장들은 단지 대표자, 곧 하늘에 있는 실체의 “모형과 그림자”(히 8:5)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모세의 성막의 상징들은 희생제물이요 제사장으로서 마쉬아흐의 봉사에 대한 직접적인 예증이라고 설명하며 그분이 바로 죽어가는 각 희생물과 중보하는 제사장의 모든 행위에 의해 묘사된 실체이심을 강조하였습니다. 스가랴는 오래 전에 왕이신 마쉬아흐께서 하나님의 하늘 성전에서 제사장일 뿐 아니라 재판장으로 세움을 입으실 것을 예언하였으며(슥 6:12~15) 구주께서도 자신이 친히 왕위에 앉을 것을(마 19:28)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노래한 것도 이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시 68:24) 다니엘 또한 “인자”께서 그분의 하늘 심판자리로 옮겨가시는 동일한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단 7:9~11).

 

사도 요한도 그분의 희생과 승리의 보혈을 하나님께 제시하면서 이 보좌에 앉아 계신 사자이며 동시에 어린 양이신 분을 목격하지 않았습니까?(계 5:6,7). 그는 또한 하늘의 지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시는 마쉬아흐에 대한 사실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늘 성전의 성소에서 일곱 금촛대를 돌보시는 제사장이신 예슈아를 목격하였으며(계 1:12~18) 나중에는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계 4:5)을 보았습니다. 그는 “금단”을 보았으며, “금향로와 많은 향”(계 8:3)을 가진 하늘의 봉사를 목격하였으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려서” 그곳에서 거룩한 십계명이 보관되어 있는 “언약궤”를 보았다고 진술하였습니다(계 11:19 참조).

 

지금도 이 놀라운 하늘 성소의 봉사를 이해한 마쉬아흐인은 지성소에 있는 전능한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 필요할 때마다 온갖 은혜와 자비와 도움을 얻으라는 초청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히 4:14~16). 이 얼마나 놀랍고 크신 사랑과 은혜입니까? 놀라우신 구속의 경륜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 드리는 거룩한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슈아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표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호 13:14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행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요 8:36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나의 몸값은 마쉬아흐의 것임을 표현하는 속전의 의미

성소의 기구들에 대한 교훈가운데는 20세 이상 되는 모든 남자들에 대하여 반 세겔의 세금을 징수하라(출 30:11~16, 38:25~31)는 주인님의 구체적인 명령이 있습니다. 20세는 청년이 성인이 되는 나이로, 제사장직과 레위의 봉사와 군 복무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나이로 인정되는 것이 그 당시 이스라엘의 관례였습니다.(대상 23:24,27; 대하25:5,31; 스 3:8) 처음 태어난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이 같은 성직의무에서 벗어나는 대가로 값을 지불하였으며 만일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회에 참여하고자 할 것 같으면 그도 역시 “자신의 영혼에 대한 속전”을 지불해야 하였습니다. 나이나 신분이나 부나 인종으로 인한 그 어떤 예외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은 한 개는 단순히 “반”을 의미하는 베카(BEQ’A)로 불리워졌습니다. 이 명령은 세 번씩이나 “매 인”이 그 자신의 속전을 개인적으로 준비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백성들을 무리로 계산하지 아니 하시고 오직 개인 단위로 계산하고 계심을 알려 주는 중요한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또 한 예로 유월절 떡은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출 12:4) 준비되었으며 주인님께서도 마쉬아흐인들은 개인적으로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하는 필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요 6:54 참조) 이 인두세의 또 다른 목적은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출 30:12)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과 악의 큰 전쟁의 결과로 이 지구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각 사람의 개인적인 선택의 결과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친히 회개한 자에게는 이 진노가 철회될 것임을 보장하는 “속전”을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선물로 주어진 베카를 위한 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은을 만들거나 벌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채굴하거나 주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구원함을 받았던 그 잊을 수 없는 밤에 선물로 그들의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가난한 자녀들을 위하여 준비하시는 자애로우신 하늘 아버지에 대한 비슷한 한 가지 예로 아기 예슈아를 위하여 선물로 바친 동박박사들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요셉이 애굽에서 유랑하는동안 그의 가족들을 부양할 충분한 재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각 이스라엘 백성의 영혼을 위한 보상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의 선물에서처럼 여호와의 계획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우리들은 그분의 은혜를 감사히 받고 그것을 성실하게 사용해야합니다.

 

이스라엘의 장자가 반 세겔의 속전을 지불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가운데 계수되었습니다. 그의 자유에 대한 증거였던 이 은은 나중에 다른 반 세겔들과 함께 녹여져서 성막의 기초를 이루는 데에 사용됩니다. 속전을 낼 때마다 이스라엘백성은 자신이 한 때는 적국의 노예였으며 그의 구주께서 “애굽을 너의 속량물”(사 43:3)로 받아 주었음을 명심했습니다. 이 세상 끝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 대하여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호 13:14)고 선언하십니다. 마쉬아흐께서 각 사람의 속전을 지불함이 없이는 불순종 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은 대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다윗이 백성을 계수한 사건과 베카

다윗이 백성을 계수한 사건의 치명적인 결과가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습니까? 성경은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대상 21:1)하였음을 알려 줍니다. 다윗이 이 사탄의 주장에 굴복하였을 때, 그는 요압에게 명령하여 인구조사를 실시하게 하였습니다. 요압조차도 이 일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사실(대상 21:3)을 알고 있었는데 왜, 그 믿음의 사람 다윗은 이런 죄를 범하게 되었을까요?

 

다윗은 인근 민족들 중에 그의 정복사업을 확대할 목적으로 군대를 증강시키기를 원했고 이 일을 위해서는 인구조사가 필요하였습니다. 다윗의 치세 하에서 이스라엘이 번영한 것은 왕의 능력이나 군사력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에 기인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마음에 일어나는 교만과 이기심에 따라 인구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왕과 이스라엘백성이 신뢰하는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의 군대라는 인상을 인근 민족들에게 퍼지게 할 위험이 있는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다윗의 더 큰 죄는 각 사람에 대한 속전(출 30:14)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았을까요!

 

모리아 산에서 준비된 속전(구속)

솔로몬의 성전 터가 되고, 다윗의 인구조사의 죄로 온역이 내렸을 때에 단을 쌓았던 오르난의 타작마당은 거의 800년 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모리아 산 그 장소에서 하나님께서는 죽을 운명의 이삭(장자)을 위하여 속전(구속)을 준비해 주신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깨달은 사도 바울도 구속은 예배의 기초라는 원칙을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베카에 대한 규정

베카에 대한 고대의 규정은 부자라고 더 내거나 가난한 자라고 덜 내거나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의 구속에 대한 대가를 조작하는 인간의 노력은 결코 심판자에게 받아 들여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은 조각은 “성소의 세겔”(출 38:25)에 따라 부과되었으며 각 베카는 이것과 비교되었으며 “성소의 저울”에 달려졌습니다. 너무 큰 것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반면에 부족한 것도 거부되었습니다. 어떤 대치물로도 타협할 수 없으며 기도나 눈물이나 행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표준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속에 대한 아주 중요하고 적절한 예증이라 하겠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이 원칙은 모든 세대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에 적용되었으며 구원을 위한 단 하나의 법이기도 합니다. 베카는 비교적 값어치가 없는, 작은 한 조각의 은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구원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것”(벧전 1:18,19)입니다.

 

히브리어로 속전은 코페르라 불리워졌는데 이 코페르는 대 속죄일에 사용된 단어와 같은 어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노아가 방주 덮는 덮개를 묘사할 때 쓰였던 “역청을 칠 하는 것”으로도 표현되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제하거나” “속하는 것”으로도 번역되며, 하나님의 어린 양의 보혈로 말미암아 제공되는 덮개를 가리키는 단어로도 사용되었습니다(사 6:7,22:14,27:9). 그분의 죽으심은 회개한 죄의 기록을 말소하거나 제하거나 “가리웠으며”(출 30:15; 레 4:20,16:18,33; 요일 1:9) 인간의 빚을 갚아 줌으로 그의 “차용증서”“빚 문서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골 2:13,14) 이와 같이 베카는 우리에게 구속에 대한 이해를 더해 주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념물로도 불리워졌던 베카

출애굽기 30장 16절에서 베카는 기념으로 불리워졌는데, 이 단어는 “기억하라”라는 단어의 어근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성경에서 “기억하다”라는 말은 항상 회상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상을 띠고 있습니다. 예로 십자가상에서의 강도는 구주께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였을 때에 그는 이 단어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요청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카가 모여졌을 때 그 은은 녹여서 성막을 둘러싼 50개의 널판을 받치는 받침대 또는 기초를 형성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그 은은 뜰을 둘러싼 기둥들을 장식한 뚜껑이나 기둥머리 뿐 아니라 휘장을 거는 아홉 개의 기둥들의 받침대에도 사용되었습니다.(출 38:28)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이 빛나는 은으로 이루어진 이 구역들을 바라볼 때 그는 자신의 해방은 값으로 산 것이며 그의 헌신은 “영혼의 속죄”(출 30:12,15,16, 속전과 속죄는 동일한 히브리어의 번역)를 가져온 “속전”에 의해서 보증되었음을 기억합니다. 실제적으로 속전으로 만들어진 이 받침대들은 그 기둥들이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도록 받혀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통찰력이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속의 대가, 곧 마쉬아흐의 완전한 순종의 생애가 온 성막과 그것을 위하여 세워진 모든 것의 기초가됨을 상기시켰습니다. 성소에 사용된 모든 은과 마찬가지로 베카의 은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의 마음을 예슈아 마쉬아흐의 완전한 순종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이중 속전을 지불하신 예슈아

예슈아께서는 성전에 온전한 세겔, 곧 두 베카를 바친 것으로 기록에 남은 유일한 분이십니다.(마 17:24~27) 사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속전을 매수하거나 바칠 수 없습니다.(시 49:7 참조) 그러나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자기 자신을 인간과 동일시 하셔서 “장자”(히 12:23)가 되심으로 마쉬아흐“두 몫”(신 21:15~17)을 받을 권리를 얻으셨습니다. 마쉬아흐의 피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며 그분의 순종은 우리를 위하여 받아들여진바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영원부터 사랑이신 그분께서는 자기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으며 이 엄청난 사실들이 모든 성소 예배의 기초(은 받침)를 이루게 됩니다.

 

성소의 벽이 세워지고 영원한 예배가 시작될 수 있기 전에 마쉬아흐의 완전한 순종의 은 받침대가 하나님의 계시된 목적을 유지하기 위하여 바로 이 땅의 흙먼지 위에 세워져야 하였습니다. 그분의 완전한 순종의 확실한 기초를 의미하는 이 베카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고 경외하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귀중한 가르침을 알려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이 거룩한 성소를 살펴볼 때에 두렵고 떨리는 감격의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아멘!  샬롬!

posted by Yaac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