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ion Church :: 성령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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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믿고 가르치며 예슈아 마쉬아흐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Yaacob
2014. 2. 8. 13:47 외솔/시대의 길잡이

성령에 대하여

마가복음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왕국의 새 포도주

우리는 계속적으로 예슈아를 마음 가운데 모심으로, 이기심과 죄를 마음에서 지울 필요가 있습니다. 마쉬아흐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 지도자들의 마음은 바리새인의 사상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그들을, 새 포도주를 담기에 적합하지 않은 낡은 가죽 부대들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분은 그의 왕국의 새 포도주를 넣을 새 부대를 찾으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그분이 바리새인들에게서 돌아서서 갈릴리의 비천한 어부들을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예슈아께서는 세상이 일찍이 알고 있었던 가장 위대한 교사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가 교육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입술로부터 나온 말씀들을 받아서 취하여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하게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예슈아께서는 그의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를 그분의 사업을 위해 교육시키십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허망한 것과 경박한 것들을 비우는 그만큼 확실하게, 그 빈 곳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마음에 쌓은 선한 것으로부터 선한 것들, 풍부한 사상의 보석들을 낼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그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더 이상 자아에 집중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사상과 애정은 마쉬아흐에게 머물 것입니다. 우리는 의의 태양이 우리에게 비춘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사할 것입니다. 마쉬아흐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샘을 고갈시켰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고갈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필요를 느끼자마자,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실 수 있습니다. 그 샘은 언제나 가득차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시키셔서 진리의 기별을 선포하십니다. 많은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강권하심을 받아 여기저기로 급히 다니면서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붙는 불과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비추려는 불타는 열망으로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 학식 있는 사람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러 나가도록 독려될 것입니다.

 

미래에, 일상적인 삶을 살아오던 사람들이 여호와의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그들의 일상적인 직업을 버리고 자비의 마지막 기별을 선포하러 나갈 것입니다. 가능한 한 신속하게 그들은 일을 위해 준비될 것이며, 하늘의 대리자들과 협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과 시간을 주의 사업에 헌신하고 또 헌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일꾼들을 방해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들이 위대한 사명을 성취하러 나갈 때 그들의 성공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지상의 험한 곳에 복음의 씨를 뿌릴 때에 어떤 조소하는 말도 그들에게 해서는 안 됩니다.

 

생애의 최선의 것들인 단순성, 정직성, 진실성, 정결, 결백한 고귀함은 매매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항상 신뢰하면서, 단순하게 수고하는 겸손한 사람들은 우리 주인님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들의 끈기 있는 기도는 영혼들을 십자가로 데려올 것입니다. 그들의 자아 희생적인 노력에 협력해서 예슈아께서는 사람들의 심령을 감동시키셔서 영혼을 회심시키는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일꾼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면서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불의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3,4).

우리가 온유하고, 가르침 받고자 하는 정신으로 성경을 살핀다면, 우리의 노력은 부요하게 보상받게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성경은 기도와 함께 연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성령의 조명(照明)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에 있기만 하다면, 그분의 빛은 부요하고, 명확한 빛줄기로 우리를 비춰 줄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제자들의 경험이었습니다. 성경은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행 2:1~3)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심히 구할 때, 그와 유사한 축복을 기꺼이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들의 주인님께서는 초대교회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후에 하늘의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또한 그의 축복을 충만히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늘은 그분의 보화로 가득차 있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들은 그분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적 권태와 무관심, 나태 때문입니다. 이 형식성과 무감각에서 벗어나도록 합시다. 이 시대에 해야 할 위대한 사업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인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하고자 하시는 것을 절반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 생명의 수여자

예슈아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하나님께 가납될 만한 봉사를 하기 위하여, 우리는 “거듭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적대적인 우리의 선천적 기질은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마쉬아흐 예슈아 안에서 새로운 남녀들로 만들어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낡고 새로워지지 못한 삶은 사랑과 신뢰, 그리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새 삶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그런 변화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수적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요 3:7),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신 하늘 왕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업에 결함이 있게 될 것이고, 세상적인 계획들이 도입될 것이고,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이상한 불이 그분께 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불안과 근심이 가득하고, 거룩하지 못하고 불행할 것입니다.

 

중생으로 대표되는 마음의 변화는 오직 성령의 효과적인 역사하심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로지 그것만이 우리를 모든 부정에서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고 꼴 짓도록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식별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이 나라에 들어감을 얻을 수 있기 전에 이루어야만 할 변화의 필요성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만과 자아 사랑은 하나님의 성령을 대항합니다. 영혼의 모든 선천적 경향은 자기중심적 기질과 자만에서 마쉬아흐의 온유함과 겸비함으로의 변화를 반대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영생으로 가는 길을 가려고 한다면, 자아의 속삭임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과 회오 가운데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탄원해야 할 것입니다.

 

은혜의 소나기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슥 10:1).

동방에서 이른비는 파종기에 내렸습니다. 그것은 씨가 발아하기 위해 필수적이었습니다. 기름지게 하는 이른비의 영향 아래, 부드러운 새싹이 움터 오릅니다. 그 계절의 거의 끝에 내리는 늦은비는 곡식을 익게하고 추수를 준비시킵니다. 주인님께서는 성령의 사역을 나타내기 위해 이러한 천연계의 작용을 사용하십니다. 이슬과 비가 먼저 씨를 발아시키고, 그 다음에 곡식을 익게 하고 추수를 준비시키는 것처럼, 성령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영적인 성장 과정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곡식의 익음은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 우리의 품성 가운데 온전히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하게 마쉬아흐의 형상(Likeness)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른비를 받아들이기에 상당 부분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공급해 오셨던 모든 은택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 부족된 것이 늦은비에 의해 채워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가장 풍요한 은혜가 부여되는 그때에, 그들은 그것을 받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열고자 하나 그들이 심각한 잘못 가운데 있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그분의 빛과 지식을 주심으로 시작하신 그 일은 계속 진행되어야만 하기에 그러합니다. 각 사람은 분명히 자신의 필요를 인식해야 합니다. 마음은 모든 불결을 비우고, 성령께서 거할 수 있도록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의 부어짐을 위해서 죄의 고백과 포기, 열렬한 기도와 하나님께 자신들을 헌신함으로써 준비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동일한 일이, 보다 더 깊게 지금 행해져야 합니다. 그런 후에, 인간 대리자

는 단지 축복을 구하면서 주께서 그에 관한 일을 완전케 하시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예슈아 마쉬아흐 안에서 인간을 온전케 하면서, 그의 일을 마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심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은 모든 진정한 기도를 불러일으키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간구 가운데 성령께서 우리와 모든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신다는 것을 배워 왔습니다. 이런 우리의 간구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며, 그분의 뜻에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롬8:26)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병자나 다른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모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우리가 하나님께 배운다면, 우리는 그분의 계시된 뜻에 일치되게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분의 뜻에 순복하는 가운데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게 간구해야 하며, 귀한 말씀을 의지하고 마쉬아흐께서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 자신을 내어 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선언합니다.

 

예슈아께서는 모든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거룩케 하는 성령의 감동을 주고, 그분 자신으로부터 그분의 백성들에게 생명력 있는 감화를 불어넣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슈아께서는 우리가 지금부터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나뉠 수 없습니다. 마쉬아흐는 인간 대리자들 안에 사시고, 우리의 재능을 통해 일하시고 우리의 역량을 통해 활동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그분의 의지에 복종해야만 하고, 사는 것이 더 이상 우리가 아니고, 우리 안에 사시는 마쉬아흐가 되도록 성령과 함께 활동해야만 합니다.

 

우리를 위한 성령의 기도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하나의 통로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단 하나의 이름, 우리의 대언자 주 예슈아의 이름을 통해서만 그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의 성령은 우리의 기도에 영감을 불어넣으십니다. 어떤 다른 불도 성소에서 하나님 앞에서 흔들었던 향로에 사용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기도가 그분께 받아들여질 만하려면, 주님께서 친히 우리 마음에 그 불붙는 갈망을 불러일으키셔야 합니다. 우리 속에서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우리의 필요에 대한 깊은 의식, 우리가 간구하는 것들에 대한 강한 열망이 우리의 기도를 특징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기도들은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즉시 응답되지 않는다고 하여 지치거나 간청을 중단해서도 안 됩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여기서 침노가 의미하는 것은 야곱이 나타낸 것과 같은, 거룩한 열심입니다. 우리는 격렬한 감정을 일으키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차분하면서도 줄기차게 우리는 은혜의 보좌에 우리의 간청을 열렬히 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서,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겸손히 낮추는 것입니다. 그분의 섭리와 은혜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 기도의 목적은 우리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어야 합니다.

 

우리의 참 모습의 상태인, 연약하고, 무지하고 속절없는 자신을 볼 때, 우리는 겸손한 간구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거나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과 마쉬아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확실한 표시와 증거는 자신이 위대하거나 선하다고 느끼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심령의 자만은 항상 심령의 빈곤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함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모든 소망은 우리가 마쉬아흐와, 그리고 하나님과 친족이 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주는 강력한 말씀들을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고, 마음속에 마쉬아흐의 은혜가 거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마쉬아흐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6,17).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우리는 마쉬아흐에 의해 세상에서 나와서 분리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심령을 하나님께 계속해서 가까이하고, 삶 속에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임재하시게 함으로 거룩한 삶을 살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진실로 마쉬아흐를 믿는 각 사람은 그분의 사랑의 은혜가 그의 마음속에 있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한때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던 곳에 그분과의 협동이 있음이 드러날 것이며, 한때 육적 본성이 나타났던 곳에, 하나님의 속성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의 백성은 의의 일꾼이요,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자요, 그분의 뜻을 계속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마쉬아흐 안에서 완전케 할 것입니다. 천사와 사람들과, 타락하지 않은 세계에, 우리는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그의 나라의 원칙을 충실하게 따르는 자들이라는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마쉬아흐와 및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로 이끌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룩함이라는 귀한 열매들이 맺혀질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사이에 운행하심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볼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죄로 죽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 아래 죄를 깨닫고 회심하게 되는 것을 압니다. 경솔하고 고집불통의 사람들이 진지해집니다. 강퍅한 사람들이 죄를 뉘우칩니다. 믿음 없는 자들이 믿게 됩니다. 도박을 일삼는 자, 술주정뱅이, 부도덕한 자들이 차분해지고 말쑥해지고 정결해집니다. 반항적이고 고집 센 자들이 온유해지고 마쉬아흐를 닮게 됩니다. 이러한 품성의 변화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회심시키는 능력이 그 사람 전체를 탈바꿈시켰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보지 못했지만, 완고하고 냉혹한 죄인들의 품성이 변화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그분의 역사의 증거는 볼 수 있습니다. 강한 바람이 우뚝솟은 나무들을 쓰러뜨리는 것처럼, 성령은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시며, 유한한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에 한계를 그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십니다. 이 능력의 감동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떨 것입니다. 그의 확신은 너무나도 깊어서 감정의 격동은 심령을 격발하게 하고, 몸과 마음은 진리의 확신케 하는 능력 아래 부복할 것입니다. 주인님께서 회개하는 영혼에게 용서를 말씀하실 때, 그는 열심에 충만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차게 되고 원기 왕성하게 되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억제할 수 없게 됩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시는 마쉬아흐께서 그 안에 거하시므로 그의 사랑의 감정은 과거의 비탄과 고민에 비례해서 깊고 열렬하게 됩니다. 그의

영혼은 터져 버린, 큰 깊음의 샘과 같게 됩니다. 그는 하늘의 거문고가 기쁨의 음조를 울릴 때까지, 감사와 찬송, 기쁨을 쏟아 부을 것입니다. 그는 간증 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꽉 짜여진 보통의 형식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예슈아 마쉬아흐의 공로를 통하여 속량함을 받은 영혼이며, 그의 전 존재는 하나님의 구원을 깨달음으로 감격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방문하심

그 안에서 너희도…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하나님의 성령의 깊은 감동하심으로 성령께서 오시는 일의 특성이 성경에 공개되었습니다. 성경은 성령께서 임하신 영혼들 앞에 놓여진 위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곧 대적의 격렬한 공격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대적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허지로 돌아가게 만들 시험들을 가지고 그들을 압박할 것이며, 성령께서 나타내시고 증거하신 중대한 진리가 하늘의 빛을 받은 사람들을 정결하게도 거룩하게도 하지 못하게 하여, 마쉬아흐께서 그들 안에서 영화롭게 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 빛을 간직하지도 못하고 그 빛에 입각하여 활동하지 않는다면, 영적 광명의 시대는 그에 상응하는 영적 암흑의 시대로 변할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신령한 감동을 소중히 하지 않고 거룩한 곳에 거하지 않는다면, 성령의 감화는 마음에서 점점 사라질 것입니다.

 

영적인 지식 가운데 진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샘 옆에 서서, 은혜스럽게도 그들에게 열려진 구원의 우물물을 되풀이해서 마실 것입니다. 그들은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샘물을 떠나지 말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이 나타난 곳에서 감사와 사랑에 부푼 마음으로 그들은 계속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요 6:36). 이것은 많은 경우에 글자 그대로 성취되어 왔습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진리에 대한 통찰과, 자비롭고 긍휼하시며 사랑이신 그의 품성에 대한 통찰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비추임을 받은 후에 그들은 그에게서 떠나 불신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빛을 다른 영혼들에게 반사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거룩한 계시에 조화되게 행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렇게 행하지 않았기에, 그들

은 잃어버린바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심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예슈아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부어 주기 위해 내려 오셨습니다. 빛과 진리와 능력의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쉬아흐께서는 그의 택한 백성을 자신에게 어떻게 복종시키십니까? 그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입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마음에 말씀하시고 인간의 마음에 진리를 새기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쉬아흐께서는 보혜사를 그의 제자들에게 보내실 것이라고 확약하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13,14절).

마쉬아흐의 이 약속은 충분히 이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결핍으로 인해 율법의 정신과 율법의 영원한 의무는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마쉬아흐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관계는 여전히 존재하나 희미하게 이해될 뿐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그분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어렴풋이 이해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헌신의 성격을 인간의 마음에 드러내시는 것이 성령의 직무입니다. 성령의 사역으로 영혼은 계몽되며, 품성은 새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고상하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를 비추심

예슈아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요 12:35).

“빛이 있을 동안에 다니라”고 예슈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단 하나의 빛 줄기도 놓치지 말고 모으십시오. 빛 가운데서 행하십시오. 우리에게 제시된 진리의 모든 가르침을 실행하십시오.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십시오. 그러면 그 때 우리는 예슈아께서 어디로 가든지 그분을 따를 것입니다. 주께서 증거에 증거를 더하시고, 빛에 빛을 더하시는데 영혼들은 왜 이 빛 가운데 걷기를 주저합니까? 왜 사람들은 빛에서 더 큰 빛으로 걷기에 왜, 그렇게 게으를까요?

 

주께서는 구하는 그들에게 그의 성령을 주시기를 거절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의하지 않습니까? 모든 주저와 지체로 인해 우리는 하늘의 빛을 받아들이기가 더욱더 어려워지고 마침내 훈계와 경고에 감동되기가 불가능한 지경에 자신을 놓게 됩니다. 죄인들은 더욱더 쉽게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행 24:25)고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빛 안에서 행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을 따르고 자신의 판단을 따라 행하므로 심각한 위기를 자초하게 됩니다. 양심은 점점 무뎌집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더욱 더 멀어지고 범죄자는 자기 자신의 범죄에 열중케 됩니다. 고집으로 그는 모든 호소에 저항하고 모든 조언과 충고를 멸시합니다. 그의 구원을 위해 행해진 모든 준비에서 돌아섭니다.

 

하나님의 기별을 전하는 자의 목소리는 심령에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더 이상 그를 제어하는 권세를 발휘하지 못하며 “그는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호 4:17)는 선고가 내려집니다. 그의 홀로 서기는 얼마나 암울하고, 음침하며 완고합니까! 죽음의 무감각이 그의 마음에 있는 듯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영혼이 통과하는 과정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지 말고 그 역사를 내몸에 이루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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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aac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