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갈라디아서 2:18~21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마쉬아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마쉬아흐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마쉬아흐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을 통해 참 마쉬아흐인은 죄 없는 삶 이외에는 다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백하기를 “내가 마쉬아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마쉬아흐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살게 되기를 바라는 간절하고 겸비한 마음과 태도로 성경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8절에서 무엇을 헐고 무엇을 세우면 범법한 자가 된다고 했습니까?
이 질문은 마쉬아흐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하여 예슈아 마쉬아흐를 믿었던 자들에게 하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에 관한 성경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슈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또 그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골 2:10,11). 마쉬아흐께서는 그 자신의 육신으로 “원수된 것”곧 육적인 마음을 폐지하셨습니다. 그 자신의 것을 폐지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것인 죄와 연약함을 폐지하셨습니다.
이로 보건대 헐어지고 멸하여진 것은 죄의 몸이며 마쉬아흐의 할례를 받지 못한 육적 몸 곧 육적인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멸하여진 죄의 몸을 다시 세우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마쉬아흐께서 얻으신 승리를 받기만 하면 됩니다. 마쉬아흐의 승리는 이미 이루어진 하나의 실제적인 현실입니다. 마쉬아흐의 승리를 믿는 우리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믿음이 또한 그 승리를 우리에게 현실이 되게 합니다. 이 믿음을 잃어버린 자들은 그 현실 밖에 놓이게 되고 옛 사람의 죄의 몸(육적인 마음)이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비록 마쉬아흐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이 죄의 몸을 멸하셨지만 각 개인에게는 현재의 개인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19절에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율법이 죽었다는 의미로 하신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완전한 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어떤 사람도 율법에 의해서 죽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율법을 향하여 죽게 됩니까? 그 율법이 선고하는 형벌인 사망을 받음으로 율법을 향하여 죽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은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죄 때문에 율법에 의해서 당한 죽음에서 마쉬아흐의 생명 가운데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새 생명 가운데서”행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은 마쉬아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마쉬아흐께서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롬4:25). 그러나 우리가 마쉬아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죽지 아니하면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죄로 상한 불쌍한 인간이 존재하는 곳 어디에서나 그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가 계십니다.
앞서 살펴 본 바에 따라 죄는 개인적인 문제이며 인간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1~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죄는 우리가 나면서부터 우리의 모든 체질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났으므로 우리의 생명은 죄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을 가져가지 않고는 우리로부터 죄를 가져 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내 자신의 개인적인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개인적으로 지은 죄 뿐만 아니라 마음 가운데 있는 죄 곧 내 모든 생명 속에 있는 죄, 그 얽매어 있는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악인은 “죄의 줄”에 매어 있고(잠 5:22참조) 스스로 그 죄를 씻을 수도 없다고(렘 2:22 참조)알려 줍니다. 내 죄는 내 자신이 범한 것이며 내 자신 안에 있으므로 그 죄를 나로부터 분리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우리 자신이 이 분리할 수 없는 죄를 떼어서 마쉬아흐께 지울 수 있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나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님께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십자가로 지셨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불신과 무지 때문에 자신들이 무거운 죄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상은 마쉬아흐께서 그죄의 짐을 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쉬아흐께서는 십자가로 모든 세상의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내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내 안, 내 마음 안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슈아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예슈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시인할 것입니까?
주 예슈아께서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계셔서 바로 우리 입에 계시며 마음에 계시다는 사실을 시인하며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거기에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구세주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이십니다. 부활하신 마쉬아흐가 죄인의 마음속에 계시므로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마쉬아흐도 마음속에 계시는 것입니다. 마쉬아흐께서 우리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오직 이 진리를 믿고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실제로 있는 것같이 보고 시인하며 믿고 사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신 마쉬아흐가 계시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그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죄가 모든 육신 안에 있으므로 마쉬아흐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만민에게 전해져야할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예슈아의 믿음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비록 마쉬아흐께서 각 사람 안에 계신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그분의 의를 삶 가운데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의로 진리를 막”(롬 1:18)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하기를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며…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6~19)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죄인과 마쉬아흐인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마쉬아흐께서 모든 사람 안에 계시지만 죄인에게서는 시인을 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하나 마쉬아흐인에게는 믿음으로 그 안에 거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마쉬아흐인에게 필요한 것은 죄인인 그 자신이 마쉬아흐와 함께 죽고 마쉬아흐의 죽음이 그 자신의 죽음이 되도록 하여 예슈아의 생명이 그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쉬아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은 곧 바로 살기 시작하며 이것은 자기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내 안에 계신 마쉬아흐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만이 요구됩니다. 마쉬아흐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에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셨습니다(요 6:57 참조).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을 믿는 예슈아의 믿음은 그가 죽을 때에 삼일 만에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거듭거듭 확신있게 주장하게 한 그러한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시고 “아버지여 내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죽으셨습니다.
그에게 죄를 완전히 이기게 하고 그 결과 사망을 이기는 이김을 주었던(히 5:7 참조) 그 믿음은 예슈아께서 믿음에 의해서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는 마쉬아흐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히 13:8)입니다. 이제 사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안에 살아계셔서 우리를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 자신의 믿음을 사용하시는 마쉬아흐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로 하여금 그자신의 길을 좇아 우리 안에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슈아의 마음이니”(빌 2:5). 그저 우리는 단순히 그를 받아들이고 시인함으로 마쉬아흐를 우리 안에 살게 하는 것 그 일만을 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이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마쉬아흐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만일 의가 율법에 의해서 왔다면 그때에는 마쉬아흐의 죽음은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의 할 의무를 지적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각자의 노력에 의해서 온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말씀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마쉬아흐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얻어야 할 유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쉬아흐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 안에서만 구원이 있으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온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선포되어 있습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 53:10,11). 원하는 자는 누구나 그 구원의 은혜 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고후 6:1) 않도록 자기 자신을 경계하고 매일의 삶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 2장의 교훈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신 복음은 오직 하나의 복음 뿐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가르친 방법은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15:1)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외적으로 받는 할례는 이미 믿음으로 받은 의의 표로써 주신 것입니다. 이 할례의 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셨다는 표이므로 만일 우리가 율법을 범할 때에는 그 사실이 조롱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롬 2:25~29 참조).
그러나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를 신뢰하고 마쉬아흐를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오늘날에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없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지, 오직 마쉬아흐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지와 같은 구원론에 관한 문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교리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쉬아흐께서 육신을 쓰시고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셨다고 설명하며(갈2:21, 롬 8:3,4 참조) 구원 받는 모든 사람은 마쉬아흐의 죽으심과 부활과 생명의 체험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마쉬아흐께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고 행하여 그 율법의 의로움을 보여주신 것은 단순히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 의를 이루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1~7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슈아 마쉬아흐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사도 바울은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묻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3절 말씀을 히브리 원문으로 살펴보면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요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니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완고함과 거역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우상에게 숭배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순종과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은 적마쉬아흐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옛적에 행해졌던 이 마술과 사술이 시대가 바뀜에 따라 강신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강신술을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영과 교통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사탄의 영들과 교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근본 정신인 속임수, 기만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전 9:5)입니다. 강신술 하는 자와 그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자는 그 자신을 사탄의 지배 아래 두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강신술을 부인하고 비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붙들지 않는다면 앞으로 있을 강한 기만에 휩쓸려 갈 것입니다. 오직 마쉬아흐의 인내의 말씀을 지킴으로써만이 지구에 다가오는 시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계 3:10 참조).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은 적마쉬아흐의 영인 사탄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 마쉬아흐의 복음만이 이 기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 깨달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눈앞에서 못 박히신 마쉬아흐라는 이 구절이 그저 사도 바울이 기술적으로 묘사하는 말이며 그들의 상상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과 그들은 성령의 역사로 이 십자가의 사건을 실제로 볼수 있었습니다(고전 1:17,18 ; 2:1~4 참조). 이 경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꼭 있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떨어지는 낙엽과 새 잎들이 이 일에 증인이며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있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도 이 일에 증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쉬아흐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눈으로 직접 보고 순간마다 그 십자가를 볼 수 있기까지는 복음의 실체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 갈라디아서의 연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눈이 열려 이 복음의 실체를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슈아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 질문에는 단 하나의 대답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다만 듣고 믿음으로써 입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요 7:39, 엡 1:13 참조). 그리고 이 질문은 이 서신을 읽을 갈라디아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맞습니다. 마쉬아흐인의 생애를 시작하는 길은 바로 이길 뿐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슈아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창조시에도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운행 곧 생명이 있을 수 없음을 스가랴 4장 6절(“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만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실 수 있으며 사람의 어떤 행위로도 인간의 마음 속에 마쉬아흐를 모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죽은 사람이 호흡을 만들어 내어 살게 되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될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슈아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바울이 이 서신서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마쉬아흐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그들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그를 영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쉬아흐를 보고 영접해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 어리석다는 말은 아주 미약한 표현에 불과합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능력이 없는 것은 그 일을 마칠 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 발자국 내디딜 힘이 없고 혼자 서 있을 힘조차 없는 사람이 달리기 경주에서 이길만한 힘이 있겠습니까? 누가 스스로 태어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능력이 없지만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신생아가 터트리는 첫 울음소리를 내는 그 연약한 힘도 그 아이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힘과 능력은 우리 자신이 아닌 전적으로 다른 분으로부터 오는 힘과 능력입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우리가 스스로 태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의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고, 살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은 성령으로 마쳐야 합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마쉬아흐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마쉬아흐 예슈아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이 일은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성경은 확실하고 단호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4,5). 이 질문으로 우리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의 큰 경험이 있었으며 그 결과로 핍박을 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릇 마쉬아흐 예슈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그런데 그런 그들이 지금 마쉬아흐를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의는 마쉬아흐를 통해서 오는데 이와 같이 마쉬아흐를 떠나는 것은 곧 진리의 율법에 대한 불순종이 됩니다. 알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구하고 있는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믿고 기사를 행한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니고 “듣고 믿음”으로 다시 말하면 믿음의 순종으로 된 것이었습니다(롬 10:17 참조). 이와 같이 바울의 수고와 갈라디아인들의 처음 경험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경험과 아주 일치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은 유대인들이었으며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그 사실의 증거로 할례 받을 것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8~10)
그러나 바로 그 주장이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였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의 의를 가졌었습니다(롬 4:11 참조).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고 그의 믿음이 “의를 행하였기에”(히 11:33),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6,7). 이 사실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이 지금도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징조를 실제로, 목적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잘못된 이해가 많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그들은 의가 선한 행실에 드러난다고 보며 선한 행실은 의를 가져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얻은 의, 일하지 않고 이루어진 선행은 그들에게는 비실제적이고 환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실제적인 믿음의 사람”들로 자처하며 어떤 일을 이루는 유일의 길은 그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믿음은 극도로 “연약할 때”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으므로 먹으라고 가져다 주는 약조차도 일어나서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에게는 그 일을 해보라는 그 어떤 권면도 비실제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의를 위하여 믿는 모든 사람들, 오직 참 믿음을 가진 자들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단 하나 유일의 실제적인 일은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생길 때 우리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라는 말씀을 실제적으로 믿고 따르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 11:33).
갈라디아서 3:8~12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이방인을 위한 복음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갈 3:8).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방이 곧 아브라함을 뜻하며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뜻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일찍이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전파되었으며 그 복음을 전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복음은 참되고 유일한 복음인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였던 복음도 같은 복음이며 우리가 가진 복음 또한 아브라함이 가진 복음과 똑같은 복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시대에도 마쉬아흐께서 활동하신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전까지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베드로나 바울의 시대에도 전혀 새로운 전도가 아니었습니다. 유대 백성을 이방인 중에서 취하여 내셨으며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 었습니다(행 15:14~18; 롬 11:25,26 참조).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 이방인 중에서 한 백성을 구원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불변의 증거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러한 뜻을 성취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어떠한 이방인도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복음이 아니고는 달리 구원 받기를 바랄 수 없다는 사도 바울의 설교를 잘 새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2,33).
아브라함과 함께 받는 복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 축복은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하는”(행 3:25,26) 마쉬아흐를 통하여 얻는 의의 축복을 뜻합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죄의 용서는 동시에 의의 축복을 가져다 준다고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
누가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합니까?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여 보십시요. 성경은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119:1),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4)라는 말씀이 명백히 선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속한 자들은 믿음으로 계명을 행하며 아브라함이 받은 그 복을 함께 받는 자들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본성과는 정반대이므로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되는 것은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의를 얻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행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오히려 의로부터 더 멀리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벧후 1:4)을 믿으면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며”(벧후 1:4) 모든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저주는 율법에 기록된 모든 일을 계속 행하지 않는 데에 달려 있으며 축복은 율법을 완전히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되게 믿는다면 정죄를 받지 않고 오직 믿음이 율법에 일치되게 해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그러면 성경이 선한 일을 무시한다고 가르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선한 일을 높이 삽니다.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또한 불신하는 자들을 책망하여 말씀하기를 그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고 하였으며 디모데에게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고 권면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골 1:10)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마쉬아흐 예슈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은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예비하시고 이루셨으며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쌓아 두셨습니다(시편 31:19 참조).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이와 같이 선한 일은 행하여야 할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행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오직 선하신 분만이 실행할 수 있으며 그분은 곧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어떤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신 큰 은혜인 것입니다(히 13:20,21 참조).
그러면 누가 의인이며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믿음을 통해서 바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요일 5:17) 또한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그러므로 모든 불의는 불법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며 모든 의는 율법에 순종하는 것임을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의는 우리가 얻어야 할 목적이며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그 의의 표준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어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있게 될까요? 그 답으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고 행위로는 전혀 그렇게 될 수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기”(롬 10:10)에 여하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의인에 대한 이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예외는 있을 수 없으며 중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다른 의인은 믿음과 행위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지 않고 단순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고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지고 지탱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보다 위대한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만이 이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기에 그러합니다(롬 7:12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주 예슈아를 영접하면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사시면서 완전히 율법을 이루어 주십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책에 쓰여져 있건 돌비에 새겨져 있건 간에 글자로 쓰여진 율법이며 이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단순히 “이것을 행하라” 또는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이 말씀은 글자로 쓰여진 율법이 생명을 제시하는 조건이며 율법은 행위, 오직 행위만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어떻게 얻느냐 하는 것은 제시된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살펴본바 지금까지 율법의 요구를 이룬 사람은 전혀 없으며 율법을 행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자신의 생애에 완전한 순종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생명은 움직이는 행위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갈 3:12)”
그러나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살아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죽은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허물과 죄로 죽은(엡 2:1)” 사람은 의를 행할 수 없기에 그러합니다. 마쉬아흐만이 그 안에 생명을 지닌 유일한 분이시며 그분만이 의를 행하였고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을 시인하고 영접할 때, 그때는 더 이상 우리가 산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마쉬아흐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 있는 그의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만듭니다. 이러한 우리의 믿음이 살아 계신 마쉬아흐를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기에 우리의 믿음이 의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바치며, 살아 계신 반석이신 마쉬아흐를 마음에 모시게 되면 그 마음은 하나님의 보좌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살아 있는 율법이 우리의 생명이 되며 이 생명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폐지되었다 혹은 변경되었다, 효력이 줄었다라고 주장하는 단 한 절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어떻게 율법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의롭게 되는 것인가(칭의)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거룩한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에 대해 갈라디아 형제들에게 가르치기를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된다는 거짓 가르침은 죄인에게 더욱 저주를 가져다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저없이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슈아 마쉬아흐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각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일한 참된 의로 제시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기초이며 주제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자랑하였지만 그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대신 바울은 마쉬아흐를 자랑으로 삼았으며 그가 이와 같이 가르친 율법의 의로 하나님의 이름이 바울을 통해서 영광을 받게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갈라디아서의 연구를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이해가 분명히 마음에 새겨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 두 성경구절을 통해 사망, 저주, 축복, 구원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볼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이 두 구절은 우리에게 확실한 십자가의 이해와 구원에 관한 깨달음을 갖게해 줄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과 자세로 함께 연구하기를 바랍니다.
사망의 쏘는 것이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이 말씀으로 미루어 사망은 저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쉬아흐는 나무에 달리시므로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를 위하여 저주로 삼으신바 되셨습니다. 저주와 사망은 죄로부터 이르게 됩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은 사망을 낳는다는 것을 갈라디아 3장 10절을 통해서 이미 배운 바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그저 살아있는 모습과는 관계없이 마쉬아흐의 말씀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요 6:53)고 하시며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죽음, 곧 사망의 몸인 것입니다(롬 7:24참조).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저주는 가장 매력적인 죄 속에 숨기어져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사망인 것입니다.
저주로부터의 구원
“마쉬아흐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고 생각하기를 마쉬아흐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속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불순종의 저주에서 구속하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구속을 받았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옳다라고도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저주는 불순종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갈 3: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롬 8:4)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구속을 받을 수는 있으나 모든 사람이 다 구속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하기도 합니다. 마쉬아흐께서는 자신의 귀하신 피 곧 참 생명으로 온 인류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율법의 모든 의로운 요구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않은데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의미이며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쉬아흐께서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죄의 쇠사슬을 산산조각을 내셨기 때문에 모든 얽매이기 쉬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분의 구원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더 이상 좋고 나은 미래를 위해 헛된 희망을 갖고 또 그것을 위해 애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마쉬아흐께서는 죄의 감옥 문을 활짝 여시고 죄의 포로들인 우리에게 “나오라”고만 하십니다. 우리가 마쉬아흐를 믿을 때에 그의 승리는 곧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승리를 받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신 마쉬아흐
“마쉬아흐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는 말씀은 곧 “마쉬아흐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고후 5:21)바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나무에까지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그의 몸으로” 짊어지셨다는 것은 그저 피상적인 일이거나 상징적인 일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그 일로 인해 죄들이 그 안에 있게 되었고 마쉬아흐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바 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를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마쉬아흐께서 그 몸으로 짊어지신 것은 그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들의 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벧전 2:22;고후 5:21 참조) 사망을 삼키는 무한한 생명의 능력으로 죄를 받으셔서 완전히 삼켜 버리셨습니다. 우리에게 그의 이 놀라운 생명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육신 속에 있는 온갖 죄로부터 해방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들은 이미 정복되었고 쓰러진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패배당한 원수와 싸우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슈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우리 자신을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에 바칠 때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헛되이 지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쉬아흐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도이며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그의 위대한 사랑이며 온 인류에게 전하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밝히 보여주신 것
1. 죄와 사망으로 부터의 구속은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되었습니다.
2. 복음은 모두 십자가에 들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 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는 죄에 빠진 인류에게 오직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드러나 계십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전하신 모든 것입니다. “마쉬아흐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울이 알고자 했던 모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입니다.
4. 마쉬아흐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주로 사람들 앞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주에서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마쉬아흐께서 저주를 담당하시는 것으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저주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그 저주를 담당하신 마쉬아흐가 계십니다. 마쉬아흐는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담당하고 계십니다. 즉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땅에 선고된 저주(창 3:18)로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도마쉬아흐의 십자가로 구속을 받았습니다.(롬 8:19~23 참조)
5. 마쉬아흐께서 저주를 담당하신 것은 오직 십자가 위에서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를 위해서 저주가 되신 것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타났기에 그러합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저주로 부터의 구원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정복자요 구원자이신 마쉬아흐의 십자가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저주 그 자체는 십자가를 제시하며 우리의 구원을 선포합니다.
6. 저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지상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 위에는 불완전함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불완전함이 저주입니다. 인간도 불완전하고 아름다운 초목도 그 옛날 하나님께서 좋으셨다고 하시던 그 아름다움으로 보면 불완전한 것입니다(사 26:4 참조).
7. 이 모든 일의 결론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슈아 마쉬아흐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살전 5:9). 저주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땅과 인간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은 마쉬아흐의 십자가가 어디에나 있다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모든 풀잎사귀와 모든 꽃과 과일 심지어 매일 우리 앞에 놓여진 음식물까지도 마쉬아흐의십자가의 인이 찍혀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숨 쉬며 기동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이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이 그가 만드신 모든 만물 안에 나타나 있으며 그 능력이 곧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엡 3:20)인 것입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자들
우리가 죄의 깊음 가운데 있으나 살아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께서 십자가상의 마쉬아흐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 심지어는 저주까지도 사실은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 됨은 만일 주님을 믿으면 절망의 원인이 되는 대신에 구속의 보증이 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또한 우리가 주 예슈아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진다면 예슈아의 생명도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날 것입니다.(고후 4:10,11 참조) 마쉬아흐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고후 5:21 참조) 그가 짊어지신 저주를 통하여 우리가 받는 축복은 바로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저주는 범법이므로(갈 3:10 참조) 축복은 우리 각자가 우리의 죄와 허물에서 돌아서는데 있습니다. 마쉬아흐께서 저주와 사망의 고통을 받으신 것은 “마쉬아흐 예슈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은 무슨 복이었을까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참조). 이 축복은 이방인에게 뿐만 아니라 믿는 유대인에게도 임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무할례시에 이 축복을 받고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며 저주는 죄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가 십자가를 드러낼 때에 바로 그 저주는 주님에 의하여 축복으로 선포되어 집니다.
비록 우리가 죄인이기는 하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우리의 것이라는 보증이 됩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쉬아흐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엡 1:3)주셨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축복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가 이 선물을 원치 않았거나 혹은 고의로 내던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외에는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이 축복을 넘치게 받을 수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쉬아흐를 받고 믿는다면 죄가 우리를 절대로 지배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마쉬아흐인이 깨달아 알아야 하는 진리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약속
마쉬아흐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성령의 선물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잘못 읽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마쉬아흐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일은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입증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인 것과 구속받는 일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는 일입니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시며(요 16:8참조)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며 성령은 진리이시며(요일 5:7)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요일 5:10). 마쉬아흐께서는 지상의 사람들 가운데 성령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십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 증인의 증거를 받을 수 있고 성령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즐거워 할 수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이 우리 위에 임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약속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약속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한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기업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기업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그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하신약속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시며 우리가 그
의 자녀들로서 같이 참여하는 약속-한 유업의 약속-입니다.
마쉬아흐는 우리로 하여금 의의 유업을 받도록하기 위하여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마쉬아흐께서는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기를 하나님께 흠없이 드리어 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시기”(히 9:14,15 참조)에 그러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마쉬아흐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마쉬아흐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14).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크신 목적은 예슈아 마쉬아흐 안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조화되게 하여 아름답게 하나님의 뜻 안에 통일되게 하고자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이 안에 우리들이 잘 조화 되어 신실한 마쉬아흐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외솔 > 시대의 길잡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 마쉬아흐인 (0) | 2014.02.09 |
---|---|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0) | 2014.02.09 |
성령에 대하여 (0) | 2014.02.08 |
“정한 관” (0) | 2014.02.07 |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2) | 2014.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