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마쉬아흐인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는 우리 구세주의 사랑스러운 보살핌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느끼십니까?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선하심과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의 심령은 풀어지게 됩니다. 우리들은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전개될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유일한 안전은 마쉬아흐와 동행하는 것이며 우리의 손은 주인님의 손을 붙잡고 우리의 심령은 완전한 진리로 채워져야만 합니다. 주인님께서는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하라”(사 27:5)고 호소하십니다. 우리 각 개인은 주인님의 온유하신 품성을 마음에 품고 주님과 더불어 겸손히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우리 자신들을 숨겨야 할 것입니다.
외식적 신앙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스스로 자랑하며 교만과 허영심을 마음에 품은 자들, 주인님의 사업에 반드시 기울여야만 했을 시간과 관심을 의복과 외모를 단장하는 일에만 허비한 자들은 두려운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의복을 걸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매우 귀하게 보시는 속사람을 단장하는 일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저들의 아름다운 옷은 죄악에 젖고 병들었으며 허영심과 교만으로 가득 찬 심령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마쉬아흐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는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쉬아흐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어떠한 고난을 겪으셨는지 그 광경을 바라볼 때 우리들은 세속적인 교만과 자신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숭배하는 일을 그칠 것입니다. 우리의 최고 관심의 대상은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마쉬아흐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능력을 다하여 주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자신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래서 자기를 단장하는 욕구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슈아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고 하셨습니다. 자아 만족의 사상은 우리들의 시야에서마쉬아흐를 가리워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온유와 겸손의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기를 바라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예슈아를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결국 주인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성경에 그러한 사람들의 상태는 평범한 옷을 입고 왕의 잔치에 나온 사람으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왕 앞에 나갈 때에 요구되는 준비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를 위하여 비싼 값으로 준비한 옷을 입는 것을 경멸하였습니다.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마 22:12)는 임금의 호령에 그는 아무 답변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칭 마쉬아흐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름만 가졌을 뿐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높이 받들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슈아께 배우기 위하여 그분의 발 아래 앉은 것처럼 저들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마쉬아흐의 재림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애에서 자기 자신이 언제나 첫째 관심이 되어왔으므로 구세주께서 오셨을 때 저들은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쉬아흐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 체험적인 지식을 통해서 마쉬아흐를 알고 있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인님께서 이 불쌍하고 기만당하고 준비하지 못한 영혼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만족하고 안전하게 주인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 영혼들을 바라보실 때 주인님은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이시겠습니까?
최후의 심판의 날에 쓰라린 실망을 맛보게 될 자들 중에는 외식적인 신앙을 유지하며 겉으로만 신앙 생애를 해온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들이 하는 모든 일에는 자아가 엮어져 있습니다. 저들은 자신의 덕행, 영향력,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에 설 수 있는 재능 및 진리에 대한 저희 지식이 마쉬아흐의 칭찬을 받게 하는 줄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만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주여,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눅 13:26),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
치 아니하였나이까”(마 7:22)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마쉬아흐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3,21)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분명하고 정확한 교훈에 온 마음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마쉬아흐인의 당연한 의무에 대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이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 아름다운 광경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인식하면서 일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삼고 자신의 생애를 통해서 마쉬아흐의 은혜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나타낼 것입니다. 생애에 따르는 모든 환경 속에서 그는 마쉬아흐의 모본을 자신의 지침으로 삼을 것입니다. 모든 참되고 자아 희생적인 하나님의 교역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재물과 목숨을 기꺼이 바칠 것입니다. 마쉬아흐께서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고 하셨습니다. 참된 마쉬아흐인은 도움이 요구되는 곳에 열렬하고 사려 깊은 도움을 아끼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동료들을 위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낼 것입니다. 참된 마쉬아흐인은 봉사하다가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쉬아흐께서 그분의 진주 보석들을 거두시기 위하여 오실 때에 그는 자신의 잃었던 생명을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든 마쉬아흐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애 가운데 빛과 소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이 올 때마다 그 기회들을 성실하게 계발시키는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사상이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다면 어떻게 이런 기회들을 계발시킬 수 있겠습니까?
자아 중심의 사상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게 많은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상실하게 됩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기 자신에게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하고 묻는 것은 마쉬아흐의 종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한 후에 결과들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느낄 수 있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즐거움 곧 순결한 생각, 동정어린 말과 친절하고 이타적인 행동에서 오는 즐거움을 각자가 맛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한 봉사의 생애를 사는 자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진 생애를 사는 사람들을 빛나게 해주는 마쉬아흐의 빛이 비칠 것입니다.
우리들이 서로의 생애에서 진리를 밝히 증거하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굴욕을 당하시게 됩니다. 자기 자신만을 즐겁게 하고 만족시키는 생애를 사는 자들은 주님께 욕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모르는 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그릇되게 나타낸다면 주인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해서 일하실 수 없으십니다. 구속의 경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강한 것일지라도 모든 죄의 습성을 정복하고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령 가운데 마쉬아흐의 사랑을 가진다면, 모든 마쉬아흐인들이 극기의 정신으로 철저한 열성을 나타내 보인다면,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를 바라시는 주인님의 사업은 지금보다 훨씬 큰 성공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부족에 대하여
마쉬아흐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더욱 큰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행사하기 위하여 극도의 흥분 상태에 이르러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란 사람들끼리 상호간의 말을 믿는 것과 꼭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자신의 길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믿음은 우리의 무지 대신에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의 약한 것 대신에 하나님의 힘을, 우리의 죄된 것 대신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우리 생명, 우리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축복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진실, 성실, 순결은 인생의 성공 비결입니다. 이런 원칙들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선한 의욕과 포부는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생명만이 참된 성장과 실력을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인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꼭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분의 허락을 잠잠히 의뢰해야 합니다. 주인님께서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주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확고히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십니다.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께서 미쁘신 분인 것처럼 믿음직스럽게 행동해야 합니다. 믿음은 무한한 능력을 가져다주므로 의혹에 대하여 말하지 말고 믿음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 능력을 붙잡고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을 의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믿음을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실제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허락에는 어디에나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자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행한다면, 하나님의 모든 힘은 우리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허락 자체에는 무엇이거나 허락하신다는 선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눅 8:11). 씨 안에는 실제적으로 그 씨를 자라게 하는 맹아력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물은 그 허락 가운데 확실히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허락을 받아들일 때, 그 선물은 우리의 소유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믿음은 그 자체가 선물로서,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것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소유로 하기 위하여 믿음을 행사할 때 그 믿음은 자라나게 됩니다. 믿음을 강하게 하려면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말씀에 접촉해야 합니다. 믿음은 생애의 작은 일에 있어서도 큰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요긴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의 이해관계에서 하나님을 영속적으로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힘은 실제로 우리의 힘이 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분, 기질, 사상, 말, 성향, 목적 및 행동 등을 면밀히 비판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영적 건강 상태를 확증해 보지 않고 어떻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서 지혜롭게 요청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 생활 가운데서 걷기 어려운 굽은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해이하고 아무렇게나 올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믿음에 있는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봉사하는 자의 태도
멸망해가는 이웃들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마음이 충만해 있는 사람들은 봉사하게 될 기회를 찾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 되시는 마쉬아흐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봉사하려는 자는 아무리 그일이 작고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지위에 처하게 되더라도 자기의 사명을 기꺼이 짊어져야 합니다. 참 마쉬아흐인들은 온유한 겸손의 정신을 가지고 주님을 위하여 일하여야 하며 살아가는 동안 부딪치게 되는 여러 가지 혼란과 어려움들 속에서도 견실한 믿음을 굳게 붙잡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분을 섬기도록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일상 생애의 원칙으로 삼지 않을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의 올무가 됩니다. 주인님의 사업과 관련되어 있는 자들은 확고 부동한 성실성을 유지하여야 합니다. 언제나 자기 앞에 주인님을 모셔야 하며 성경 말씀이 증거하는 모든 문제들을 끊임없이 연구하여야 합니다.
경건하고 엄격한 성실성을 가진 사람은 비록 인간을 해이한 원칙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환경 속에서 살면서도 자신의 마쉬아흐인적인 사상을 보존할 것입니다. 마쉬아흐인 성품을 계발시키는 일에 있어서 오늘날의 이 세상은 노아의 시대보다 조금도 유리한 것이 없습니다. 노아의 시대는 죄악이 너무나 관영하여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창6:7~9)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타락한 세대의 부패속에서도 노아는 그의 창조주께 기쁨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지구 역사의 마지막 날 곧 죄와 부패로 가득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노아처럼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있는 자로 살아야 하며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벧전 2:9)이신 주인님께 찬송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주인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에 하늘 아버지께 올린 기도 가운데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하셨습니다.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바치신 주인님께서는 어떤 것을 가장 고상한 봉사로 평가하실까요? 무한하신 사랑을 소유하신 그분께 어떤 사업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늘 아버지와 독생자 예슈아께 가장 큰 만족과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멸망하여 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마쉬아흐께서는 인류에게 복음의 구원하는 능력을 가져오시기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사업을 전진시키기 위하여 그분과 협력하며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기울여 일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무리가 하늘 보좌의 주위에 서게 될 때 구세주의 기쁨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흑암의 세력은 맹렬한 세력으로 역사하고 있으며 해마다 모든 족속과 민족과 방언에 속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경고도 받지 못하고 준비도 없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보다 뚜렷하며 더욱 결정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들에게,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이들에게 ‘그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가?’하고 물어보십시오. 선교적인 분야의 일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극기와 자아 희생적인 정신으로 일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그대로 믿는지 물어보십시오. 경고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백, 수천만의 영혼들이 영원한 멸망에 빠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법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답변해야 할까요? 두 번째의 은혜의 기간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런 때는 결코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현재 가지고 있는 은혜의 기간 뿐입니다. 타락한 인류의 구원은 지금 이 생애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과 그렇지 못하면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주인님의 정신으로 가득차 있다면 우리들은 주인님과 협력하게 될 것이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열렬하고 자아 희생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요일 2:4)다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커다란 각성이 우리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기별을 전해야 할 자들은 열심으로 주인님을 찾아야 할 것이며 그분의 성령께서 풍성히 임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위하여 기도함으로 우리들은 영혼들을 위하여 성공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고의 기별을 전해야 함
우리는 순수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진리에 대한 실제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반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믿음을 따라 실행에 옮깁니다. 온 세계에 이 시대를 위한 징조들이 성취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은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맑고 뚜렷하며 분명한 경고들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위험에 처해 있을때 우리는 우리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조건들을 연구해야 하며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며 유전이나 외람된 오류들을 좇는 것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며 서서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기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예슈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은 목적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마쉬아흐인들은 우리의 머리 되시는 주인님의 지도를 따라 연합하여 일하여야만 합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은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리라”(사 58:1)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진리를 불완전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위하여 영혼으로 외치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마음 문을 연다면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들어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우리는 사탄을 정복할 수 있음
우리들이 예슈아 마쉬아흐를 의지하고 의에 이르는 순종을 나타내 보일 때에 하나님의 천사들은 우리들의 심령이 의에 이르도록 일합니다. 우리 주인님께서 사탄의 대리자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던 모든 기간 동안에 하늘의 천사들은 주인님과 같이 있었습니다. 사탄과의 투쟁 가운데서 마쉬아흐께서는 그분의 말씀으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인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마 4:4)를 전적으로 의지하셨습니다. 주인님께서 당하신 시험은 실제적인 유혹들이었으며 허위적인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마쉬아흐께서는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히 2:18).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마쉬아흐께서 사탄과의 투쟁에서 가지셨던 모든 도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에게 정복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신 주인님을 통해서 보다 큰 정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전 6:19,20)고 우리 주인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대가입니까?
인성을 쓰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인간을 공격하는 모든 유혹들 곧 격렬하고 겉으로 보기에 압도적인 시험과 씨름하셨는데 그 시험들이란 식욕의 방종,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는 일에 나타내는 주제넘은 모험심, 이 세상의 우상 숭배, 이생의 현혹적인 쾌락 때문에 영원한 축복을 희생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시험을 받을 것이로되 우리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받도록 허락하시지 않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교활한 원수를 대항할 수 있으며 패배시킬 수 있습니다. 하늘 천사들은 시련을 당하고 시험을 받는 영혼에게 도움을 주려고 항상 준비하고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주인님께서도 우리들을 위하여 시험과 시련을 견디셨습니다. 마쉬아흐와 사탄 중 누가 우리들의 임금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온전히 우리들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큰 시련 가운데서 마쉬아흐께서 받으셨던 모든 도움을 충분히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십자가는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린 바 될 필요가 없으며 모든 영혼들을 위한 넉넉한 도움이 준비되어 있다는 보증으로 서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탄의 대리자들을 정복할 수 있으며 반면에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대항하려는 세력과 합세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계속적으로 우리의 행동과정을 살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예리한 식별력이 필요하며 우리 자신의 실제적인 삶의 경건을 통하여 진리는 예슈아 안에 있었던 그 모습 그대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늘의 사자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서 인간들의 약점을 도와주고 도덕적이며 육체적인 위험에서 모든 영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언제나 준비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인간들이 저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때에 비로소 인간의 정신에 작용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일하며 그분의 계획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늘 천사의 보호가 허락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열렬하고 통회하는 기도로써 하늘의 도움들이 우리 편이 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과 권세를 가진 천사들은 겸손하고 온유하며 낮은 자들과 함께 일할 것이라는 약속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히 1:14)
주님께서는 우리들 각자가 결정적으로 진지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영적 문제에 있어서 실수를 범할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앞에는 “내가 어떻게 함으로 영원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나눠주시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들 각자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일임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우리의 가치
사탄은 사망의 권세 아래 영혼을 이끌기 위하여 대리자들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천사들은 시험에 빠진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천사들과 협력할 대리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마쉬아흐께 속했다는 인식을 가지고 활동할 자들, 곧 마쉬아흐의 편에서 일할 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찾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 사람들은 높은 자이건 낮은 자이건 간에, 시험에 빠진 자신들에게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로 하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경멸히 여김을 받고 무시를 당하고 상처를 입으며 사탄으로 말미암아 멍이 든 자신들을 마쉬아흐께서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며 완고한 인간들 곧 영혼을 순결케 하는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믿음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자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사망에서 영혼을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일을 위하여 하늘의 대리자들과 협력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할 것이며 또한 저들을 통해서, 저들로 말미암아 일할 것입니다. 이런 일에 천사들과 협력하는 자들은 저들 자신을 매 순간 깊이 살피게 되며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는 저들일지라도 미혹의 길에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조수,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지도를 받으며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도와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수행하기 바라시는 모든 방법을 따라서 하나님과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고 있는지, 매일 마쉬아흐의 정신을 갖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말과 행동에 있어서 주님의 뜻을 이행하려고 힘쓰고 있는지 조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폭동과 살인과 절도와 온갖 범죄로 말미암아 이렇게 혼란한 때를 과거의 역사에서 볼 수 있었습니까?
이러한 때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서 있어야 하겠습니까? 이사야 58장에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자들”에 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금식을 받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사 58:4)고 분명히 우리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5~7)
영원에 속한 우리의 보상
“그리하면(저들이 자비로운 행동과 궁핍한 자를 도와주는 일을 한 연후에)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사 58:8). 우리는 율법의 교훈들을 실천에 옮겨야 하며 그리할 때에 우리의 의가 앞에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호위하게 됩니다. 마쉬아흐의 의의 빛은 우리의 앞길을 비추시며 여호와의 영광은 우리의 뒤를 지켜주십니다. 이러한 보증을 우리에게 주신 주인님께 감사 드립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위치에 꾸준히 서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련을 맺는다는 것, 그분의 조수가 되어 그 분의 일을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고상한 특권임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인류의 구속 사업을 위한 하나님의 크신 경륜 가운데 주인님께서는 그분의 조수로써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주인님께서는 인간에게 접근하시기 위하여 우리들의 도움을 요구하십니다. 주인님은 이웃들을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재빨리 식별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활동적인 사람들의 협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쉬아흐께서는 죄 많은 인간들을 위하여 그분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인님께서는 범죄의 생애에서 인류를 건져내시어 순종과 의의 생애로 인도하기를 바라시며 자신을 저들이 구원자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주인님께서는 천국이 줄 수 있는 가장 부요한 보상 곧 영원한 생명까지라도 제공하십니다. 아, 우리 각 사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치르신 무한한 대가에 대해서 좀더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도 바울은 “너희는…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전 6:19,20)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시고 산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쉬아흐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초청을 거부할 수도 있으며 주인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화평을 등한히 여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하든지 간에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보혈로 사신 바 되었다는 엄연한 사실만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3)는 교훈과 우리들을 위하여 치르신 희생의 값은 너무나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들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모두는 사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소유물을 잘 보살펴야 하는 책임만이 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무한한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들을 사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정신도 주인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주 예슈아 마쉬아흐께 속한 우리의 몸, 혼, 영을 남용할 권리를 가진 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난 것이든 혹은 은밀히 행하는 것이든 그 어떤 형태의 이기적인 방종으로 체력과 정신력을 점차적으로 약화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두뇌를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 두뇌를 사용하기를 바라십니다. 멸망해 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사업에 있어서 인간은 그 두뇌를 가지고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꼭 알맞은 지력과 추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정신력과 체력을 교육하고 훈련해야 하는데 이것은 마쉬아흐께서 값을 치르시고 사신 인체의 기능으로서 우리는 가능한 한 이 기능을 최선의 상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보존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신력과 체력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데 그 까닭은 하나님과 더불어 동역하는 더욱 유능한 일꾼들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저희 본분을 성실하게 이행하는 자들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고전 3:9)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은 신령한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은 봉사의 제단에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바친 모든 자를 통하여 일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영혼은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으며 그분께서 가납하실 만한 수고를 할 수 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 대열에 참가하기를 바라십니다. 주인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저희가 가진 여러 가지 재능에 따라 지정된 일을 주셨습니다.
열렬하고 꾸준하게 활동해야 할 필요성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무 선한 일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두고 그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구속 사업에서 맡은 분야의 일을 수행하고 그 일을 더욱 잘 해보리라는 결심을 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겸손하면서도 꿋꿋한 정신으로 이 결심을 추진해 나가는 자들의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에게 속한 단 한 가닥의 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력한 영혼을 예슈아 마쉬아흐께 꼭 붙잡아 매어 두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두도록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관습과 유행에 보조를 맞추어 나가기 위하여 애쓰는 생활에서 어떤 만족을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에게는 꼭 이루어야 할 더 큰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품성을 예슈아의 품성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재능, 모든 관심과 생각, 모든 행동을 활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들은 과거에 전혀 본 일이 없는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들을 앞서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값으로 사신 바 되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으로 여겨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동료 인간의 복리를 위하여 사용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마쉬아흐의 십자가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열렬하고 끈기 있는 충성으로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슈아께서 거룩한 인성을 지니시고 많은 고난을 겪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우리들에게 깊은 의미가 있는 중대한 진리들을 우리들은 너무나 소홀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들은 죄의 악한 특성을 깊이 깨닫고 죄를 가증한 것으로 증오하게 될 때까지 마쉬아흐의 생애에 나타난 극기와 자아 희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다짐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구속의 오묘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하늘 아버지께서 예슈아 마쉬아흐를 통하여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시는 미쁘심에 대하여 감사하도록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일깨워야 합니다. 우리가 골골타(골고다)의 십자가에 매달리신 마쉬아흐를 바라보게 될 때에 주님의 자비와 사랑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영원한 보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시고, 예슈아를 믿고 사랑하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 각 사람들은 어떠한 감사의 답을 드려야 할까요!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진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는 모든 자들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주인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예슈아만을 높여야 합니다.
성소 제도를 통해 옛 유대인들은 희생 제물에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피를 흘리신 마쉬아흐를 상징적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제물들은 마쉬아흐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예슈아 마쉬아흐의 피만이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며 피흘림이 없는 곳에는 사함이 없다는 위대한 진리에 저들의 심령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왜 하나님께서 그처럼 많은 희생 제물을 원하셨으며 유대인의 제사 제도에서 그처럼 많은 피 흘리는 제물을 바치기를 원하셨는지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모든 죽어가는 희생제물은 마쉬아흐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었고 가장 엄숙하고 거룩한 의식으로서 정신과 마음에 감동을 주는 교훈이 되었으며 제사장들은 이런 의미들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소 제도의 희생 제물들은 마쉬아흐의 피를 통해서만이 죄에 대한 용서가 있다는 이 위대하고 중대한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명백하게 계획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중대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그처럼 자주 반복해서 들려주시고 지금도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불순종하며 이 진리들을 향한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담함에 천사들이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구속의 경륜에 대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직 마쉬아흐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써만 생생한 현실로 인간에게 붙어 다니는 죄, 고칠 수 없는 문둥병과 같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이 진리를 믿는 자들이 얼마나 적은지 모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여야 참 믿음을 온 인류의 마음에 넣어 줄 수 있겠습니까? 마쉬아흐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대속 때문에 고통을 당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무죄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인님의 고통은 주인님의 고결한 인격과 그분의 무죄하고 고상한 성품이 하늘보다 높으신 것에 비례하는 심각하고 처절한 고통이었습니다.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회개의 위험성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0,21).
사람들은 왜 이 말씀이 아직도 우리들의 귀에 익숙지 않은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철저히 회개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쉬아흐 안에서 살고 있지 않으며 마쉬아흐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지 못하게 합니다. 한 가지 우상을 영혼에서 내쫓을 때에 사탄은 그 자리를 대신할 또 다른 우상을 준비합니다(마 12:43~45참조). 우리들이 마쉬아흐께 전적으로 몸과 마음(전적인 헌신)을 바치고 주인님과 더불어 매일의 삶을 살지 않는 한, 우리들이 주인님을 “모사”로 삼지 않는 한 우리들의 마음은 악한 생각들을 맞아들일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생애에서 자신을 섬기는 생애로 쉽게 돌아서게 됩니다.
간혹 우리들은 회개하고 싶을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결정적으로 개혁하고 우리들이 배운 진리를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한, 우리들이 활동적이며 역사하는 믿음 곧 능력이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그런 신앙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우리의 회개는 단지 아침 이슬과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한 회개는 영혼에게 하늘의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일시적인 감정의 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회개의 심정은 망상적인 것으로서 또 한 번의 참회가 필요한 회개일 뿐입니다. 우리들에게 의의 평온한 열매를 맺게 하지 못하는 강렬한 감정의 작용은 우리들 자신을 이전보다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사탄은 매일 우리들의 앞길에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쫓는 것을 정당화하는 속임수와 그럴 듯한 변명을 늘어놓고 우리들이 옛 습관으로 되돌아가게 함으로 우리들로, 영원한 소망과 안위와 보장을 얻게 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등한히 하게 만들려고 지금도 우리 주위를 맴돌며 쉬지 않고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원하는 봉사 곧 마음속에 예슈아께 대한 사랑으로 감동을 받아 일어나는 봉사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냉담하고 이기적인 봉사는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받으실 수도 없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온전한 믿음과 완전한 애정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쉬아흐의 은혜를 완성시키는 생애 가운데서 그분 앞에서 자신을 절제하며 노력하는 모든 참되고 열렬한 영혼을 영화롭게 하시며 받들어 주십니다. 주 예슈아께서는 그분 앞에서 겸손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있는 영혼을 결코 혼자 버려두거나 배척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과 더불어 동역자가 되게 할 자격을 부여한 풍성한 은혜를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우리들이 예리하고 성화된 식별력으로 하나님의 허락에 대한 보장을 인식하면 우리 각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그 허락들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요 오직 마쉬아흐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이며 우리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산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한 마쉬아흐의 의를 우리의 의로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는 일의 중요성
마쉬아흐께서는 한 때 그분의 제자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의 제한된 이해력은 주인님을 억제하게 하였습니다. 주인님께서 공개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신 진리들을 저들에게 나타내 보일 수 없었던 것은 진리에 대하여 저들의 마음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진리를 가르쳐주는 것은 헛된 수고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마쉬아흐의 교훈들을 밝히 깨달을 수 있기 이전에 저들은 성령을 받아야만 하였습니다. 마쉬아흐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아는 지식을 따라 예슈아 마쉬아흐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면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마쉬아흐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도록 선정되며 우리는 영원한 시대를 통해서 우리를 위하여 베풀어진 잔치에서 주신 축복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배우게 됩니다.
미숙한 아이에게나 어울릴 기질, 습관 및 품성의 특징들을 그대로 가진 채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의혹, 비판, 급한 성미 및 자존심 등을 길러왔다면 그 잔치를 망치게 되므로 그 자리에 들어갈 허락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을 통과하여 들어갈 모든 자들은 하늘의 베틀로 짠 혼인 예복을 입은 자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품성에서 결점을 끄집어내는 버릇을 스스로 키운 자들은 가족들을 불행하게 만들며 영혼들로 진리에서 떠나 어리석은 이야기를 택하도록 하는 추한 결함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불신의 누룩, 다른 사람의 신망을 얻고자 하는 욕구, 남을 비난하는 정신은 우리 자신을 그 문으로 못 들어가도록 막습니다. 상호간에 완전한 신뢰로 결합하고 사는 이웃들의 행복에 흠을 낼 자는 단 한 사람도 이 문을 통과하여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슈아께서 그 안에 사는 모든 자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늘 임금의 품성을 나타내지 않는 한 아름다운 영광에 싸이신 하늘 임금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지와 지혜를 버리고 마쉬아흐에 대하여 배울 때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허락을 받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전적이며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십니다. 생애의 질서, 인격의 도야, 품성의 형성을 위하여 우리의 생애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목에 주인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주인님의 인도를 받고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마쉬아흐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오직 마쉬아흐께 속한 성품을 선택하여 주인님의 관심사들이 우리의 관심사들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주인님의 뜻을 닮고 그 뜻만을 이행하도록 주인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제자가 되는 조건들이며 이 조건들에 따라 살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안식은 마쉬아흐 안에 있으며 주인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주인님의 멍에를 우리의 목에 메는 순간은 그 멍에가 가볍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며 그 때에 비로소 가장 힘든 영적 노력을 기울일 수 있고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질 수 있게 됩니다. 그 까닭은 주인님께서 힘과 권세를 주시기 때문이며 사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즐거운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바로 우리 구주 예슈아 마쉬아흐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천국의 대주재이시며 영광의 왕이십니다. 주인님께서는 신령한 사물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순결하게 되어 이기심의 찌꺼기나 비뚤어지고 거칠며 매정한 우리의 성질들을 버리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내적이며 고상한 체험을 얻어야만 하며 마쉬아흐 안에 거하므로 은혜 가운데서 자라는 체험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통회할 때 우리는 형제들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고 오직 형제들을 든든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고 책망하심으로 시작되어 넉넉히 우리들이 마쉬아흐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도록 키워주십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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