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전에서 태양을 경배하겠는가?
뿌리칠 수 없는 의문들.
안식일과 일요일 준수의 기원과 역사를 확인하는 사람마다 마음에 떠오르는 의문이 있는데, 그것은 도데체 어떻게 해서 이교에 근원을 둔 배도의 상징인 일요일이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일이 될 수 있을까?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무 날이나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도 동일한 생각을 하실까?
예배는 드리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제사와 예배에 대하여 참으로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신 하나님이 아니신가?(창4:3-5; 레10:1-3; 삼상13:8-14).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행17:30) 모든 것을 밝혀 오늘날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실까?
안식일 대신에 일요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태양을 숭배하던 이교도들과 함께 떠오르는 해를 향하여 기도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올바른 것인가? 태양을 향하여 드리던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으로 합리화했던 중세기 교부들의 해석은 올바른 것인가? 아무 날이나 하루 예배하면 된다는 통념(通念)으로 이 모든 역사적 현실을 간과(看過)할 수 있을까?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예배]하라” (계14:7).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성전 안에서 태양신을 경배하는 가증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장면은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 퍼져 있는 일요일 예배의 가증함을 일깨워 준다.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들을 네가 보았느냐 …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기로 보니 거기서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여호와의 전 문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25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낮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겔8:12-17)
이 말씀은 태양신을 높이던 날이었던 일요일(Sunday)이 안식일을 제치고 그리스도인의 예배일로 도입되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와 얼마나 흡사한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던 예루살렘 여인들이 위하여 눈물을 흘리던 담무스는 누구이며, 그들은 왜 울고 있었는가? 그리고 장로[제사장]들은 왜 낮을 동으로 향하고 태양을 향하여 경배하고 있었는가? 이스라엘의 성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지성소의 위치는 성소의 서쪽이었다. 얼굴을 동으로 향하고 태양을 향하여 경배한다는 말은 성소 안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태양신을 경배했다는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최초로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반역했던 노아의 증손자인 니므롯(창10:8.9)의 부인 세미라미스(Semiramis)는 죽은 남편의 영이 태양으로 들어가 태양신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후에 세리미스는 니므롯의 영이 재탄생한 것으로 믿게 된 사생아 담무스(Tammuz)를 낳았는데 그가 멧돼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후 그의 영은 지하 세계로 들어갔다는 신화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담무스 신화가 기원전 3500년 전부터 존재했음이 역사적으로 확인된다.
농축신(農蓄神)이 된 담무스는 바벨론 달력의 넷째 달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6월경 풀이 마르는 여름이 되면 매년 반복하여 죽기 때문에 바벨론 사람들은 그들의 넷째 달을 “두무지”(Dumuzi)로 불렸는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도 이 관습을 배워서 유대 종교력의 넷째 달을 “담무스”(Tam-muz)로 불렀다. 담무스가 죽는 넷째 달이면 고대 앗시리아나 바벨론 사람들에게 이슈타(lshtar)로 알려진, 담무스의 어머니도 되고 연인도 되는 사랑의 여신이 지하로 쫓아 내려가 슬피 우는데 이때 여인들도 함께 우는 가증한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봄이 되어 태양이 따사하게 비칠 때, 담무스는 이슈타의 애도와 애정으로 다시 부활하여 농작물과 초장을 푸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때, 그 해의 다산(多産)을 위하여 담무스와 이슈타를 위한 음란하고 난잡한 봄의 축제를 벌인다.
고대 가나안에서는 아스다롯(Astarte), 헬라에서는 아프로티테(Aphrodite), 로마에서는 비너스(Venus)로 불렸던 이슈타 숭배가 예레미야 당시의 배도한 유대인 여자들에 의하여 계속되고 있었으며(렘44:15-19), 에스겔에게 보여진 바 유대 여자들이 행하던 “가증 한 일”(겔8:13-16)도 여신 이슈타의 연인인 담무스의 부활을 위해 슬피우는 이교의 의식인 것이다. 성경은 농경에 관계된 고대의 태양을 비롯한 천체 숭배를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신4:19; 17:3; 왕하23:5.11; 욥31:26). 그런데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는 이스라엘의 여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전에서, “낮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을 경배”(겔8:16)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는 정말 “가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되풀이 된 배도의 역사.
신, 구약 성경에 걸쳐서 일관되게 준수되어 온 예배일인 “여호와의 안식일”을 제쳐놓고 “무적의 태양신”을 숭배하는 이교도의 날인 일요일을 그리스도교의 예배일로 대치한 3, 4세기 교회 지도자들은 에스겔 당시의 지도자들의 배교와 무엇이 다른가? 미국의 사학자 하이드(Walter W. Hyde)와 [카톨릭 세계](The Catholic World)에 게재된 역사를 살펴 보도록 보자.
하이드의 증언.
“제4세기의 그리스도교회가 그들의 적대 세력이였던 로마제국의 태양신교로부터 채택한 두기지 제도에서 투쟁의 잔재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페르시아의 태양신인 미드라(Mithlas)의 두 성일(聖日)인데,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dies natalis solis)로 부르는 ‘태양의 생일’, 즉 12월 25일을 예수의 생일로 삼은 것과, 서기 321년 콘스탄틴 황제가 ‘존경할 만한 태양의 날’ 이라고 부른 ‘일요일’을 그리스도교의 예배일로 삼은 것이다.”
카톨릭의 증언.
“교회는 이교(異敎)의 일요일을 취하여 그리스도교 일요일로 만들었다. 교회는 이교(異敎)의 이스터(Easter)를 취하여 그 기간을 우리의 축제인 부활절로 만들었다. 일요일과 부활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그것들은 서로 같은 것이다. 사실 모든 일요일들은 단지 부활절을 매 주일마다 부분적으로 되풀이 하기 때문에 일요일들(Sundeys)인 것이다 … 태양은 이교도들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신이었다.”
“[그리스도교에 끼친] 이교의 영향에 대한 적절한 한가지 예를 찾자면 그들이 기도를 드리는 동안 태양이 떠오르는 곳인 동쪽을 향하여 돌아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습관을 조사해 보면 된다.”
간과 할 수 없는 배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을 뜻 깊게 보내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을 정죄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중세기에 교회 안에서 시작된 배도의 역사를 깨닫게 될 때, 적어도 십계명에 명시된 “여호와의 안식일”은 분명하게 바로 잡아야 한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려는 신앙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중요한 계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질투와 분노를 가지고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성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증한 일들을 보여주시는 장면에서, “약 25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겔8:16)하는 모습은 우리 모두를 경악케 한다. 성전 안뜰의 가장 거룩한 곳에 있던 25명의 신분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 전체를 대표하는 24반열(班列)의 제사장들과(대상24:1-19) 대제사장을 포함한 숫자로 생각된다. 그들은 유대 교회의 지도자들인데, 그들이 행한 의식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섬기던 페르시아의 태양 숭배와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의 성전이나 성소로 들어가는 문은 범죄로 닫혀진 “에덴의 동편 … 생명 나무의 길” (창3:24)이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다시 열리게 됨을 표상하기 위해서 언제나 동편을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출27:13;민3:38;겔47:1).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성전을 들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동편의 해를 등지게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 25명의 종교 지도자들은 반대로 동편 태양을 향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낮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게 경배”한 것이다.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던 유대 여자들이나 동방 태양을 경배하던 25명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러한 이교의 의식을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한 예배 의식로 행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하나님의 전에서 경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태양을 비롯한 “일월성신(日月星辰) 하늘 위의 군상 … 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을 경배하며 섬길까”(신4:15.19)염려하신 하나님께 그것은 “투기와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하는 우상의 자리”(겔8:3)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지도자들을 따르기 마련이다. 신자들은 목사들을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별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별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겔22:26)음을 모든 종교 지도자들은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겔8:17).
정직한 부정 거래 - 짧아진 자 .
조상 때부터 대를 이어서 포목점을 경영하던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부인이 그 상점에서 10야드의 천을 사가지고 가서 패턴에 맞춰 옷감을 재단하였는데 예상외로 천이 약간 모자랐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얼마 전에 새로 하온 자로 재어 보니 한 치가 모자랐다. 부인은 즉시 옷감을 가지고 다시 포목점 주인에게 가서 치수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몇 대째 정직한 상거래로 신용을 쌓아 왔는데요. 틀림없이 치수대로 드렸습니다.” 주인은 의아한 듯 언제나 사용해 온 대자를 집어 들고 천을 펼친 후 길이를 쟀다. “보십시오. 정확히 10야드입니다” 어리둥절해진 부인은 급히 집으로 가서 다시 재보았지만 한치가 부족하였다. 부인은 집에 있던 자를 가지고 포목점에 갔다. 부인은 자신이 가져온 자와 포목점의 대자를 맞추어 보았다. “보십시오! 주인께서 쓰시는 자가 한치가 짧습니다.” 참으로 한치가 짧았다.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 규격(規格) 미달의 불량(不良) 자를 썼으니 얼마나 잘못된 상도덕(常道德)인가?
그러나 사연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고조, 할아버지 등을 거슬러 대를 물린 이 포목점에서 써온 자가 오랜 세월을 경과하는 동안 조금씩 닳아서 결국 규격보다 한치나 짧아진 것이다. 포목점 주인은 물론 선대의 어른들도 모두 정직하고 신용 있는 사람들 이였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그 동안 규격보다 조금씩 짧은 옷감을 재어 준 것이다. 잘못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에 대해 하등의 책임을 지울수 없는 일이다. 정직하게 몰랐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행17:30)다.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그 동안 모르고 짧은 자를 써 온 주인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한치나 짧은 자를 계속하여 쓴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것은 명백한 도량형(度量衡) 변조(變造)에 의한 불공정 거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의 기별과 합당한 예배.
위페(僞弊)가 아닌 진짜 돈을 진폐(眞弊)라고 하듯이 위경(僞經)이나 외경(外經)이 섞이지 않은 참된 성경을 정경(正經)이라고 부른다. 정경을 영어로 “캐론”(cano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헬라어“카론”(kanon)에서 나온 말로 매듭이 있는 “갈대”와 같은 “자 막대기”를 뜻하기 때문에 “규준”(規準)이나 “규례(規例)(갈6:16)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유일한 표준이요 옳고 그름을 가름하는 척도(尺度)이다. 더구나 십계명이야말로 올바른 신앙 생활을 위한 표준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판단하는 척도로 선언되었다.(약2:8-12;마19:16-19;롬13:8-10). 열 문장으로 된 신앙의 척도인 십계명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본분인 예배를 명시한 척도 중의 척도인 안식일 계명이, 예언에 나타난 세력에 의하여 변조된 채(단7:25;살후2:3-12), 중세기를 거쳐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다니엘 7장은 중세기에 적그리스도 세력에 의해서 안식일 계명이 변경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안식일은 그 세력에 의해서 일요일로 변경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예언을 무시하고 일요일을 예배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일요일은 결코 안식일을 대신 할 수 없다. 어두움의 세력과 인간의 오랜 전통에 시달려, 달아서 거의 눈금마저 없어질 뻔한 넷째 계명이 지닌 영적 의미는 심각하다. 그것은 인간의 본분에 관한 순종의 시금석과 심판의 유일한 척도로 사용된다.
잡초 밭을 지키는 근위병.
제정 러시아 시대의 한 젊은 황제가 어느 날 왕궁 밖의 정원을 거닐다가 볼품없는 들판에서 외롭게 보초를 서고 있는 근위병을 목도했다. 보잘 것 없는 가시 덩굴로 덮인 이 들판을 지키는 이유를 묻자 초병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젊은 황제는 궁중 사관(史觀)에게 그 이유를 찾도록 지시했다. 사유인즉 한 때 캐더린 황후가 이 곳에 넓은 장미 정원을 가꾸게 하고 이를 시민들에게도 공개했는데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장미 넝쿨이 있는 한 지점에 근위병을 세워 지키게 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황후도 타계하고 장미 정원도 무관심 속에서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라온 왕실 근위대에서는 보초를 세워 이 장미 없는 잡초 밭을 아무런 뜻도 모른채 지키게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를 위한 날로 친히 지정하시고 친수(親手)로 쓰신 불변의 도덕률인 십계명에 포함시키신 안식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이해(利害) 관계에 얽매인 종교 지도자들의 고의적인 무관심과 냉대에 의하여 짓밟히고 쇠퇴된 십계명의 장미인 안식일 대신에 잡초가 무성한 빈들을 뜻없이 지키고 있는 러시아의 근위병과 무엇이 다른가? 계발된 신앙 양심과 냉철한 지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음이 편한 수가 없는 일이다.
양심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
지금까지 진행된 안식일 제도와 일요일 준수에 관한 비평과 변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된 독자는 어떤 판단에 이르렀는가? 안식일 준수를 이단의 조건으로 삼아 비평한 분들을 비롯하여, 신분이 성직자이든, 장로, 집사 등 재직이든, 일반 신자이든 상관없이 지금은 “믿어 순종케”(롬 1:5, 15:26)되어 구원에 이르러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마 15:3). 안타깝게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를 찾아야 할 시간이다. 성경에는 어느 교파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보증이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는 사도들의 담대한 신앙이 한층 마음에 사무치는 것이다. 진정한 예배는 인간의 본분이며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스스로 원하시는 방법에 의하여 예배를 받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레 10:1~3). 그러므로 예배에서 인간적인 모든 요소는 배제되어야 한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것이며,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요 4:23)고 계신다.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예배]하라”(계 14:7)는 요한계시록이 기별은 진정한 예배를 호소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탄원이다.
안식일은 창조와 구속의 기념일이라는 사실 때문에 예배의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고, “나의 구원이 가까웠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이므로 “안식일을 지켜”야 할 까닭도 더욱 분명해진 것이며,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사 56:1,2)는 보증은 확실한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참으로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은 진리이다. 진리 앞에서 괴로워하는 신앙 양심은 진리에 의해서만 영원히 자유롭게 될 수가 있음을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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