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ion Church :: 4. 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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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믿고 가르치며 예슈아 마쉬아흐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Yaacob

4. 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

1.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예수님은 유대 관원들과 안식일 논쟁을 여러 차례 하셨지만, 그 논쟁의 내용은 ‘안식일을 어느 날 지킬 것이냐’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는 정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마 12장). 요한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도덕적 율법(십계명)을 예수님은 폐하지 않으셨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을 폐지하는 것이 그분께서 오신 목적이 아니었다. … 이 율법의 모든 부분은 모든 세대 모든 인류에게 유효하다”(John Wesley, “Upon Our Lord’s Sermon on the Mount”, Discourse 5, in Works, Vol. 5(1829 ed.), pp.311,312).

 

어떤 이들은 다른 아홉 계명은 여전히 유효하고 유독 안식일 한 계명만은 폐지되었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말씀과는 너무도 모순되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마 5:18) 변경하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죄의 삯은 사망)에 의해 인류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떻게까지 지켜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은 십자가를 이제 죄를 지어도 되는 ‘면허증’이나 또는 죄를 짓고 난 후 ‘괴로운 양심을 달래주는 도구’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계명을 안 지켜도 그저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음을 보게 됩니다.

 

물론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얻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몽학선생이라 하였습니다. 몽학선생은 참 선생님에게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내가 죄를 범했구나”를 깨닫게 해 주고 “나는 죄인”임을 자각하면서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이신 구세주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범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인이 그리스도께 간 후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구원을 만끽하며 “부어라 마셔라” 즐기면 되나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의 법이 그 마음에 새겨져 계명을 지키는 것은 자연스런 삶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오늘은 간음하지 말아야지” 하고 아침마다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 그 원칙이 그 사랑의 율법이 마음에 새겨져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대해 논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는 것은 “순종”이고 남이 하는 것은 “율법주의”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 율법주의 =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 그렇다면 <간음하지 않는 것 = 율법주의 =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 그러면 율법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 밤 부터 죄를 지으면서 살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힘쓰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한다면, “나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겠다”라고 하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은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따르는 것이다”고 비평합니다. 안식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이고, 일요일은 그리스도인의 성일이라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 것이지요.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모두 율법주의자가 되는 셈인데, 이러한 단정은 두 개의 전제로부터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 추리 논법인 삼단논법을 잘못 적용한 결과입니다. 즉,

대전제: 그리스도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율법주의자였다.
소전제: 바리새인들은 모두 철저한 안식일 준수자였다.
결 론: 그러므로 오늘날도 안식일을 철저히 준수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주의자이다.


만약 이와 같은 잘못된 논리 전개가 사실이라면 걷잡을 수 없는 엉뚱한 결론들이 속출하게 됩니다. 복음서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이외에도 십일조, 헌금, 구제, 금식기도 등에도 철저한 사람들이었습니다(눅 18:11.12).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가 전개될 수 있습니다.  

 

대전제: 그리스도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였다.
소전제: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십일조와 헌금, 구제, 금식기도를 실천했다.
결 론: 그러므로 오늘날도 십일조와 헌금 구제 및 금식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주의자이다.

 

십계명을 준수함으로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섯째 계명에 따라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 여덟째 계명대로 도적질하지 않는 사람, 둘째 계명을 범하지 않으려고 신사참배를 거절함으로 목숨까지 빼앗긴 순교자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넷째 계명에 따라 성경적인 제칠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람들만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일까요?

 

율법주의란 율법을 지킨 자신의 선행을 의로 삼아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만큼이나. “무법한 자”(벧후 2:7, 3:17), 혹은 “불법을 행하는 자”(마 7:23, 13:41; 딤전 1:8,9)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 역시 율법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없습니다(마 7:23; 벧후 3:17; 살후 2:3,7,8).

 

율법주의냐 아니냐는 드러난 행함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동기를 보아야 합니다. “구원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인가? “구원을 감사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인가? 그것은 하나님만이 정확히 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함부로 자신의 기준을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엉뚱한 질문이지만 당신은,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십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려서 “창조”되시려고 합니까? 계명을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노력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그 뜻대로 살고 싶은 갈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멍에이고 힘들다면, 율법주의냐를 논하기 전에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던지 즐겨 순종하기를 원하는 사람,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고 목숨도 아끼지 않을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약 2:17). 여기서 행함을 그저 하면 좋은 것이고 안 해도 괜찮은 뭐 그런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적당히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 마음의 주인이 예수님 반, 세상 반 그렇게? 물론 아니지요. 그러나 행함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뒤에 따라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앞세우면 율법주의가 되겠지요. 우리의 급선무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는지 아는 것입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2. AD 70년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 24:2)

서기 31년 십자가에 달리시던 마지막 주간에 감람산에서 행하신 고별설교에서, 그리스도를 거절한 예루살렘의 운명을 미리 내다보시며 AD 70년에 로마 장군 타이터스(Titus)에 의하여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시는 장면입니다.

 

예고된 예루살렘의 멸망은 불가피할지라도(단 9:26), 그리스도인들이 찬비가 내리는 음산한 팔레스틴의 겨울에 불어난 요단강을 건너 피난하는 어려움과 함께, 거룩한 안식일에 피난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기도드리라는 간곡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도망하는 일은 예루살렘 멸망 3년 반 전인 AD 66년 10월 후반에 일어났습니다.

 

과연 예언 그대로 서기 70년 9월 로마군에 의한 오랜 포위 끝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어 100여만 명이 기근과 칼로 죽임을 당하는 대 파멸을 겪었습니다( Josephus, The Wars of the Jews Book V. ch ll-Book Vl . ch X). 십자가 이후 거의 40년만인 서기 70년에 있을 예루살렘의 대파멸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할 안식일임이 주님에 의하여 확인되었습니다.
 

3. 사람을 위한 날 - 안식일의 주인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이 말씀의 본뜻은 무엇인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사람의 형편에 맞추어 안 지켜도 되고 아무 날이나 지켜도 된다는 것인가? 성경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만, 사람의 형편에 따라 성경을 마음대로 변경하지 않듯이,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고 해서 안식일을 변경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사람의 행복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있는 것이니, 짐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즐겁고 존귀하게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8).

창조는 성부하나님 홀로의 사역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이지요. 안식일을 만드신 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분이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면, 안식일은 주님의 날, 주의 날입니다. 안식일은 성경에서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유일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여호와의 안식일”(출 20:10), “내 안식일”(레 19:30), “나의 거룩한 안식일”(사 58:1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예수님의 규례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16).

규례(custom)의 뜻을 잘 아시지요? 표준/공동번역: “늘 하시던 대로”, 현대어/현대인: “전에 하시던 대로” 예수님의 평생의 습관이었습니다.  

 

5. 안식일은 일하는 날이다(?)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요 9:14-16).

이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신 기사는 복음서에 약 8번 이상 더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죄로 말미암아 병들고 신음하는 인간들에게 소생함을 주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병을 치료하실 때에는 언제나 육신의 건강과 함께 영적인 삶을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에 다른 사람들의 영육 간의 소생함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은 합당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자신의 영육 회복을 도모하며 타인의 영육 회복을 위하여 봉사하는 시간입니다. “사람이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2).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지 않으신다면 이 지구가 어떻게 될까요? 아니 지구뿐 아니라 온 우주는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우주를 운행하시는 손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정신은 무시한 채 율법주의적인 짐으로 사람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귀하고 복된 안식일의 정신이 무엇인지 회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참 안식일의 의미를 회복하시면서 그날을 폐하셨나요?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안식일 예배를 폐하는 의미인가요? 아니면, 바리새인처럼 말고 예수님처럼 안식일을 지키라는 의미인가요?

 

6. 새 계명이란 무엇인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사도 요한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고 권면한 후, 곧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요이 1:5,6)고 말합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이미 신명기 6:5절과 레위기 19:18절에 나왔던 계명입니다. 그것은 결코 새 계명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사랑 없이 율법의 문자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는 계명을 재차 반복해 주신 것입니다. 더구나 “사랑만 하면 된다”는 것은 전혀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4:15절에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7. 사랑과 순종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십계명을 준수할 의무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리를 유추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므로 우상을 섬겨도 되고, 살인해도 되고, 간음해도 되고, 도적질해도 된다.” 이것이 율법 아래서 속량함 받은 사람의 삶입니까? 안식일은 위에서 언급한 십계명 중에 네 번째 계명일 뿐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안식일”에 대해서만 그런 공격을 하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치에 맞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호소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8.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드렸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사실, 이때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모인 이유를 명백히 밝힙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무덤이 비게 되자, 유대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고소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상황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이 모임은 부활을 기념하는 기쁨과 환희에 찬 분위기가 아니라 무섭고 두려우며 낙망과 불신이 가득한 모임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부활을 이야기하는 어떤 부분에서도 그날을 거룩하게 준수하라는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부활 승천 이후 몇 해가 지난 다음에 복음서들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성령님께서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지시는 내렸을 것입니다.

posted by Yaac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