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14. 03:34
주제별 성경 연구/사랑이란?
하나님의 아들(독생자)을 보내주시는 사랑
"참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자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요하난-요한복음 3장 16절)
"내 계명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고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 자신을 알게 할 것이다." 예슈아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누가 나를 사랑하면 그는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할 것이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거처를 함께 할 것이다."
(요하난 14장 21절, 23절)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하난 15장 13절)
"저는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게 했고 또 앞으로도 알게 할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기 위함입니다."
(요하난 17장 26절)
"참으로 마쉬아흐께서는 우리가 아직 약할 때인데도 자기 때에 경건치 않은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참으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사람이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하여 담대하게 죽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증명하셨으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마쉬아흐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입니다."
(로마 성도들에게-로마서 5장 6절~8절)
"그렇다면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우리를대적하겠습니까? 참으로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사자(使者)들도 통치자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마쉬아흐 예슈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성도들에게 8장 31절, 38절~39절)
"참으로 마쉬아흐의 사랑이 우리를 압박합니다. 이는 우리가 판단하기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는 것은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가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더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 죽었다가 일으켜지신 그를 위해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무도 육신에 따라 알지 않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마쉬아흐를 알았지만, 이제는 더 그렇게 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마쉬아흐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들은 지나갔으니, 보십시오, 새것들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그분이 우리를 마쉬아흐를 통하여 자신과 화해시키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사역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쉬아흐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시고 그들의 범죄들을그들에게 계산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 화해의 말씀을 두셨습니다."
(코린토 성도들에게 하-고린도후서 5장 14절~19절)
"이제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마쉬아흐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신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넘겨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함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갈라티아 성도들에게 3장 20절)
"우리 주 마쉬아흐 예슈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쉬아흐 안에서 하늘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복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 이전에 마쉬아흐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우리를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슈아 마쉬아흐를 통하여 하나님의 양자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마쉬아흐 안에서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나님 은혜의 부유함에 따라 우리 안에 온갖 지혜와 총명이 넘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획하신 기쁘신 뜻에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경륜이 때가 참에 따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마쉬아흐 안에서 합치는 것입니다.
자신의 원하시는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마쉬아흐 안에서 제비로 예정된 유업을 우리가 받아서 마쉬아흐 안에 첫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마쉬아흐 안에서 여러분은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마쉬아흐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봉인되었습니다. 성령은 우리 유업의 보증이시니 하나님의 소유로 구속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에페소 성도들에게-에베소서 1장 3절~14절)
"그러나 인애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죄로 죽었던 우리를 마쉬아흐와 함께 살리셨고 -은혜로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마쉬아흐 예슈아 안에서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혀 주셨습니다. 이는 마쉬아흐 예슈아 안에서 우리를 향한 선하신 그분의 넘치는 은혜의 부유함을 오는 세대에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에페소 성도들에게 2장 4절~7절)
"이 때문에 나 파울은 이방인들인 여러분을 위하여 마쉬아흐 예슈아의 죄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내게 주어진 하나님 은혜의 경륜을 여러분이 정녕 들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계시로 내게 신비를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간략하게 기록한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읽으면 마쉬아흐의 신비에 대한 나의 깨달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신비는 지금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영에 의하여 드러내신 것처럼 다른 세대에서는 인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신비는 이방인들이 마쉬아흐 예슈아 안에서 그 복음을 통하여 약속을 나누는 공동 상속자와 한몸이 되는 것입니다."
(에페소 성도들에게 3장 1절~6절)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모든 충만함이 거하는 것을 기뻐하셨고 그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루셔서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자신과 화해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콜롯새 성도들에게 1장 19절, 20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이 나타나 우리가 행한 의의 행실이 아니고 그의 인애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거듭남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하여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성령을 우리 구주 예슈아 마쉬아흐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으니..."
(티토에게-디도서 3장 4절~6절)
"사랑하는 자들이여, 우리가 서로 사랑합시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으며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를 통하여 우리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이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는 그분이 자기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고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슈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그 사랑을 알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은 그 안에 거하십니다. 이것으로 사랑이 우리에게 완전해졌으니 이는 심판 날에 우리를 담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니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버립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징벌이 있기 때문인데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하난의 편지 상-요한일서 4장 7절~19절)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인류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로 자기 자신의 아들 곧 예슈아를 마쉬아흐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온 인류의 죄를 쓰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주실 것을 예정하셨으므로 그 죄 사함을 받은 우리 인간들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그 예가 아브라함을 불러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쯔핰을 제물로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이쯔핰을 이끌고 3일 간이나 걸어서 모리아산으로 가면서도 그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만약에 어떤 분들의 말처럼 그의 마음 속에 망설임이나 의문이 일어났다면 마음 속의 생각까지도 살피시는 분께서 그렇게 불완전한 믿음의 결과물을 기쁘게 받으실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믿음(자기 목숨보다 더 귀중한 아들을 바치는)을 가질 수 있었는가? 아니 그러한 믿음이 가능한가?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위의 성경 말씀들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비교조차도 할 수 없을만큼 완전하기에 우리의 마음이 순결하고 순전하면 하나님 자신이 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것이 되므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슈아를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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