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대하여(2) 거절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구원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구원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것이야말로 그분의 진정한 뜻입니다. 파울은 우리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당신을 회개하도록 이끄시는 것을 몰라서 하나님의 부유한 선하심과 관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가볍게 여깁니까?”(로마 성도들에게 2장 4절)라고 묻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회개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요하난(요한복음) 12장 32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 지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다.”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겠다는 우리 주 예슈아 마쉬아흐의 확실한 약속입니다. 예호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을 그 누구도 사탄에게 내어주어 멸망시키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선하심은 모든 영혼(사람)을 회개로 인도하며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십자가로 이끄십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구원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성령님의 부드러운 인도와 호소에 저항하지 않고 따라가면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슈아께서는 사울에게 “가시 막대기를 발로 차는 것은 네게 힘들 뿐이다.”(사도들의 일들 26장 14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구원을 받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저항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대로 우리를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끄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티토에게 2장 11절).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습니까? “모든 사람에게!”입니다. 이브리인들에게(히브리서) 2장 9절은 “우리가 예슈아를 보니 그는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이 그에게 씌워졌으니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가 죽음을 맛보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마쉬아흐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시고, 그들의 범죄들을 그들에게 계산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 화해의 말씀을 두셨습니다.”(코린토 성도들에게 하 5장 19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모두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대다수의 사람이,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에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은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롭게 함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생명의 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라고 로마 성도들에게 5장 18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쉬아흐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영혼을 의롭게 만들기 위한 방책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은 온 세상을 다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지극히 합법적인 칭의(의롭다고 하심)가 영광스런 구속의 경륜으로써 “모든 사람이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칭의 는 그것이 개인적으로 인식되고 개인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만 각 개인에게 유효하게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 편에 있어서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칭의가 그 사람에게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또 “마쉬아흐 예슈아 안에서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로워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쉬아흐를 그의 피에 의한 신실함을 통하여 속죄 제물로 삼으시고 그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간과하심으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지금 이때에 자신의 의를 드러내신 것은 자신이 의로우시다는 것과 예슈아의 신실함으로 신자를 의롭다고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로마 성도들에게 3장 24절~26절)라고 말합니다. 비록 십자가가 모든 사람에게 칭의를 제공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오직 “예슈아를 믿는 자”들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전력에서 충분한 전기를 저의 집에 보내 주었지만, 제가 저의 집안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방은 어두움 그대로 있을 것이고 컴퓨터도 아무런 일을 못하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하지요. 바로 이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며, 정결케 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모든 능력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저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방금 읽은 성경 구절 중에서 “이전에 지은 죄들을 간과하심으로”라는 말씀은 칭의에 대해서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죄들을 간과하심”이나 죄에 대한 용서는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은 칭의(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심)의 경험이 자신들의 “생활 밖”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들의 영생과 멸망에 대한 운명을 이미 결정해 놓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에 대한 용서와 칭의를 말할 때에, 죄인의 마음에서 일어나야 되는 변화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변화될 필요가 있는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은 토라(율법) 앞에서 어떠한 은혜나 용서도 받을 수 없는 범법자로서 정죄 받는 존재입니다. 토라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의로움도 찾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옳은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어떤 능력도 받을 수 없습니다. 죄인은 토라의 저주 아래에서 정죄 받은 상태로 힘없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이 모든 저주와 정죄를 피할 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사도 파울은 많은 마쉬아흐인이 믿고 있는 칭의와는 반대되는 개념의 칭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마쉬아흐인은 칭의와 용서가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파울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로마 성도들에게 8장 1절~4절에서, 그는 칭의가 한 개인을 위하여 무엇을 이루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마쉬아흐 예슈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런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쉬아흐 예슈아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토라가 죄와 죽음의 토라로부터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육신으로서는 연약하여 행할 수 없는 토라를 하나님께서 행하셨으니,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죄에 대해 그 육신 안에 있는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이는 토라의 규례가, 육신에 따라 걷지 않고 영에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너무도 연약하여서 율법에 순종할 수 없는 우리의 육체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서 무엇인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성경 구절에서 우리는 dikaivwma(디카이오마)라는 헬라어 단어를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이 단어의 뜻은 규정, 법령, 규례, 의로운 행동 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토라의 요구하는 의를 이루려면 우리들의 연약한 육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치료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신 예슈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토라를 완전히 순종하도록 하심으로써, 충분한 해결책을 제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개인에게 칭의를 입혀주실 수 있는 이유는, 오직 마쉬아흐께서 완전한 순종의 생애를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쉬아흐께서 이루신 순종과 희생과 죽음이 육체 가운데 있는 나의 연약함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그분의 계획은 실패한 것입니다. 마쉬아흐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들어와 계실 때, 정죄함은 제거되고 죄가 용서되며,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마쉬아흐를 통하여 토라의 요구를 이루는 힘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가 우리 생활 속에서 만드는 변화입니다.
용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없애버림으로써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경건치 못한 것을 없애심으로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칭의) 하십니다. 그분은 반역을 제거하심으로써 반역한 죄인을 의롭다(칭의) 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실 때는, 그분의 말씀이 친히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실제가 아닌 무엇을 선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을 정복하신 그분께서, 이제는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도록 승리를 주고 계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일합니다.
하나님의 성령 충만한 자녀는, 능하신 정복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리를 전하는 일에 좀 더 확신에 차 있고 좀 더 공격적이며 담대하게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힘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되시는 그분(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적하는 자(사탄)보다 능력이 크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왜 마쉬아흐인이 마쉬아흐를 섬기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일까요? 이 질문의 뜻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거듭난 마쉬아흐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쉬아흐인 생애를 살기가 쉽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의 타고난 본성과 힘으로 마쉬아흐를 위해 살고자 애쓰는 것처럼 힘든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거듭난 마쉬아흐인들에게는 순종의 길이 즐겁고 기쁜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들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요하난의 편지 상 5장 3절). 요하난은 이 성경 구절을 통해서 사랑의 대원칙을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토라(율법)를 지키는 것이며 그것들은 지키기에 힘든 무거운 짐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토라를 순종하는 것, 그것이 예슈아 마쉬아흐와의 사랑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일 경우에는 힘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찬양들(시편)의 기자도 요하난과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찬양들 40장 9절(시편 40장 8절)입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제가 원합니다. 당신의 토라가 제 속 깊이 있습니다.” 참된 마쉬아흐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 이유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며, 자신을 최선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습니다.
두 번째, 그는 마쉬아흐를 최고로 사랑하며 그분을 결코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합니다.
오늘은 이만 마치고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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