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대하여(9)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
한번은 어떤 사람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뒤집혀 물속으로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영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때, 다른 어선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많은 물고기 싣고 있어서 더 이상의 또 다른 사람을 태운다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쌍한 이 사람을 구조해 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에게 밧줄을 던졌습니다. “여기 이 밧줄을 잡으세요. 우리가 당신을 해안까지 끌어다 주겠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밧줄을 잡자마자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구조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그가 밧줄을 붙잡고 있는 한, 그는 구조 받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 속에서 그가 해야 할 몫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그가 밧줄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다시 잡기를 거절한다면, 그는 구조되지 못합니다. 죄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가 마쉬아흐의 손을 잡고 있는 한, 그는 구원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가 잡은 손을 놓기로 마음먹고, 그 대신에 마귀의 손을 잡는다면 그는 멸망당합니다. 그의 구원은 그가 결정하는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구원을 세 시제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 그가 밧줄을 잡았을 때,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배에 매달려서 끌려오고 있을 때, “나는 구원받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가 해안에 발을 들여 놓기까지, “나는 구원받은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신학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칭의”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가 현재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고 있다면, 이것을 “성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쉬아흐께서 오실 때, 그는 죄의 본성과 육체로부터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것을 “영화”라고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시제가 모두, 성경이 구원에 대하여 설명할 경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보다 분명하게 세 가지의 시제가 나와 있습니다. 로마 성도들에게 8장 24절에“참으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받았으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과거: ejswvqhmen). 코린토 성도들에게 상 1장 18절에는“구원받는 우리에게는”이라고 되어 있고(현재: sw/zomevnoi" ), 로마 성도들에게 9장 27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있다 해도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미래: swqhvsetai).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구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세 가지 시제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보았습니다. 위에 언급한 예화를 잘못 이해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구조 받기 위하여, 그가 밧줄을 꽉 붙잡아야만 했던 사실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밧줄을 스스로 만들지도 못하고, 다만 배에서 던진 밧줄을 붙잡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자신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서 그가 끌려갔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단지 그 힘에 협력했을 뿐입니다. 그는 밧줄을 잡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가 안전하게 끌려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마쉬아흐인으로서, 우리도 마쉬아흐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해야 하고, 그분께 계속해서 붙어있어야만 합니다. 그분께 확고부동하게 남아있음으로써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마쉬아흐를 붙잡는데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돌아가라고 내쫓지 않습니다. 그분에게서 우리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그분께로부터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마쉬아흐인이 된다고 해서, 우리의 의지가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마쉬아흐인으로 생활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언제든지 돌아서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과 하늘의 사물들 대신에 다른 신과 세상의 사물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슈아 마쉬아흐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통하여서만 구원받습니다. “다른 누구 안에서도 구원은 없습니다. 참으로 사람들의 이름 중에서 우리가 확실히 구원받는 이름은 하늘 아래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사도들의 일들 4장 12절).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써 우리의 믿음을 증거 해야 됩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결과 입니다. 바로 이러한 결과들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행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예호바 하나님이신 예슈아 마쉬아흐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내재하심으로).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밧줄을 놓지 않아야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마쉬아흐께 계속하여 굳게 붙어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아콥의 편지 2장 26절). 이것으로 구원에 대하여 말씀을 마치고 다음 시간에는 다른 주제로 여러분을 만날 것을 기대합니다. 다음 시간을 기대해 주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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