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에 대하여(5) 교회에 덕이 되는 은사
여기에 방언에 대해서 37년간 연구하고 검증한 노우호 목사님의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번역한 코린토 성도들에게상 14장 1절에서 5절까지를 적어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예언을 권장)
2)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들에게 하지 아니하고 반대로 하나님께 하기 때문에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의 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을 말한다.(방언을 염려하면서 예언을 권장하는 이유)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역시 예언의 유익을 강조)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고(방언에 대해 소극적, 부정적 표현) 예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나니(예언을 긍정적으로 표현)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들(외국어들) 말하기를 원하나(소극적)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적극적)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방언과 예언 비교 결과 예언의 우월성 재확인)
여기서 예언이라 함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아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기왕에 기록된 성경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몇몇 은사를 두셨다고 코린토 성도들에게상 12장 28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는 개인의 능력을 높이고 나타내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손이 몸에서 떨어져서 스스로 일을 행할 수 없고, 눈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는 마쉬아흐의 몸이고 지체인 우리에게 교회를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코린토 성도들에게상 12장 27절 참조) 그런데 만약 이 은사가 교회를 돕는 일에 쓰일 수 없다면 그 은사는 몸에서 떨어져 나온 팔이나 눈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파울은 "따라서 만일 내가 소리의 능력을 알지 못하면 나는 내게 말하는 자에게 야만인(외국인)이 된다."고 코린토 성도들에게상 14장 1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인들에게 한국어로 백만 번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파울은 자기 말로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면 자신은 그 외국인에게 야만인(외국인)이 되고 자기의 말을 듣는 그 사람도 자기에게 야만인(외국인)이 되어서 자기가 복음을 전한 것이 결국 아무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만다고 말한 것입니다.
파울은 만약 방언을 말해야 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청중들이 알아듣도록 통역해야 한다고 코린토 성도들에게상 14장 13절과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하는 자들은 통역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내 영이 기도하나 내 마음은 열매 맺지 못합니다." 만약 통역하지 않고 단지 방언으로만 기도한다면 그것도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지만 그 기도의 의미가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통역 없이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개인적인 소원은 올릴 수 있지만 이것이 다른 신도들에게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 전체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교회에 대하여 "야만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울은 코린토 성도들에게상 14장 15절에서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또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해야 되고(곧 통역) 방언으로 찬송하면 또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찬송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기도하거나 찬송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코린토는 국제적인 도시로 각기 다른 방언을 말하는 여러 족속들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코린토 교회에도 역시 여러 방언을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울은 또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코린토 성도들에게상 14장 19절 참조)
여기서 깨달은 마음이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코린토 교회의 교인들에게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고 생각은 어른처럼 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 시간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샬롬!
'성서 대학 > 성경으로 돌아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언에 대하여(7) 코린토 교회를 향한 파울의 충고 (0) | 2015.01.31 |
---|---|
방언에 대하여(6)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한 방언 (0) | 2015.01.31 |
방언에 대하여(4) 주는 자와 받는 자 (0) | 2015.01.31 |
방언에 대하여(3) 방언 은사의 필요성 (0) | 2015.01.30 |
방언에 대하여(2) 초교파적인 방언 (0) | 2015.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