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ion Church :: '안식일에 대하여/신약성경과 예배일' 카테고리의 글 목록 (4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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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믿고 가르치며 예슈아 마쉬아흐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Yaacob

'안식일에 대하여/신약성경과 예배일'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4.08.29 5. 사도 바울과 안식일

5. 사도 바울과 안식일

1. 초대교회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행 13:42-45).  

십자가 이후입니다.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는데(행 13:14),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지 못한 이방인들이 “다음 안식일에”는 자기들에게 설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안식일에”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모인 이방인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격려하는데, 사단은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율법주의라는 딱지를 붙여줌으로써, 마치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음의 은혜를 거절한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회당에 갔다고 하지만 문맥이 전혀 그것을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회당 밖에서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시기가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는 이 중요한 자리에서 바울은 “이제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니 다음 주 부턴 일요일에 모이시오”라고 해야 할 텐데 여전히 안식일에 말씀을 전하고 있지요. 그리고 상식적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눈여겨보던 유대인들이 바울이 안식일을 어기는 것을 보았다면 그를 가만 놔두었을까요?

2. 안식일은 멍에(?)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10). 

먼저 사도행전 15장 본문 전체를 살펴봐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2년 동안 1차전도 여행 중에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널리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하여 그들의 기쁨과 신앙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소란하게 했으므로 바울과 저들 사이에 많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습니다(15:1~6). 안디옥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중에 몇 사람을 택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장로들에게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즉시 총회를 소집했는데, 이것이 AD 49년경에 열렸던 예루살렘 총회입니다.

사도들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야기된 교리적인 문제들이 다루어 졌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의식적인 율법인 할례문제는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15;7) 폐지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15:19~21).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안식일 준수 여부는 거론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여부가 거론되지 아니한 이유와 같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정사실은 아예 취급하지도 않은 것입니다(15:5~11).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전도했던 자기의 경험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5:10)고 역설합니다. 이와 같이 각종 제사 제도와 여러 가지 규율, 절기규칙들을 만들어 놓고 사람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억압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멍에가 십계명이라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돌비에 쓰신 십계명이 멍에라구요? 그러니까 고약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메지 못할 멍에를 주신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총회의 의장인 야고보가 마지막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15:19,20).

야고보의 권면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하라” 십계명 폐지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여기서 또 한 가지 충돌이 생기는데 십계명은 멍에이기 때문에 버리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네 가지의 율법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다시 말해 살인, 도적질, 거짓말,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 등 십계명은 안 지켜도 되는데, 여기 네 가지 율법은 지켜야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상의 더러운 것”이 무엇일까? 우상숭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말합니다. 우상제물하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고전 8~10장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로 교회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어떻게 권면했을까요?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Aphrodite) 여신을 섬기는 거대한 신전이 있었고 우상숭배의 중심은 역시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교의 신전에는 막대한 양의 제물들이 드려졌고 그것들은 다시 시장으로 나와 판매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시장에 나온 어떤 것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인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성도들은 본의 아니게 이방 신에게 바쳐졌던 것을 사 먹게 될 가능성이 있었으며 이 일은 교인들 사이에서 양심상의 갈등을 가져왔습니다.

이교에서 들어온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제사 때에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인 것을 기억하고는 그런 음식을 먹는 것은 나쁘다고 여겼습니다. 이제 그들이 비록 그리스도인이 되긴 했지만 그 음식을 먹는 것은 어쩐지 우상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와 반대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풀어야 한다고 권면하면서(고전 8:1),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을 먹는다고 해서 더렵혀지거나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8:4). 그러나 우상제물을 먹어도 괜찮다고 하는 이들에게 그것 때문에 신앙에 손해를 볼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먹지 말라고 권면합니다(고전 10:28,29). 음식 자체가 부정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먹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생각하고 상처를 받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고전 8:9,12,13).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제한을 받아야 합니까? 내가 하나님께 떳떳하면 됐지 굳이 남까지 신경 쓰면서 살아야 합니까? 이런 질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며 마무리 짓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내가 하나님 앞에 옳다 여길지라도 행여 그런 모습 때문에 상처받을 영혼을 생각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3).


예루살렘 총회의 결론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교회를 이루었으므로 상대방의 양심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랑 가운데서 그 자유를 자제하도록 합의한 것이었지 그 어느 문맥에도 십계명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음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 7:19).

3. 회당 없는 곳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행 16:13).  

빌립보에는 유대인들이 거의 살지 않았기 때문에,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마땅한 장소를 찾다가 바로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 말씀을 전하고, 그 온 집이 다 침례를 받게 됩니다.

4. 바울의 규례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행 17:2).

“규례”에 대한 설명은 눅 4:16절에 설명했습니다. 바울 역시 늘 자기가 하던 대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세 안식일” 어떤 이들은 드디어 새로운 안식일, 즉 주일이라고 합니다. 이런! 한글을 잘못 읽으셨군요. 새(new)가 아니고 세(three)입니다. 3주 동안(three weeks, three Sabbath days) 안식일에 자기 습관대로 설교했다는 것이지요.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 18:4).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78번의 안식일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합니다.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행 18:11). 어떤 이들은 “주일(일요일)을 지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것이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굳게 믿었던(고전 15장) 바울은 안식일을 지켰는데 그는 죽은 예수를 믿었단 말이 됩니다. 그는 예수 승천 후 23년이 지난 AD 54년경에도 여전히 십자가의 예수, 부활하신 예수를 믿었고 계명대로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5. 일요일 예배의 근거(?)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 20:7).
정확한 역사가로 정평을 받고 있는 누가는 부활 후 30여 년이 지난 서기 63년경까지의 사도교회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적어도 84회 이상 안식일이 준수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반면, 첫째 날인 일요일에 관한 언급은 이곳 한군데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님처럼, “자기의 규례대로” 드로아에서 안식일을 보내고 “안식 후 첫날(토요일 저녁)”에 모였습니다. 그 까닭은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하여” 특별히 모인 성만찬을 겸한 송별집회였습니다. 행 20:6~13절의 전체 문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피곤한 유두고가 창에서 떨어지는 일화가 나오지요. 일요일 아침부터 그날 밤까지 말씀을 나눈 것이 아니라 토요일 저녁부터 밤중까지 계속 한 것입니다. 

⑴ 안식 후 첫날 밤은 토요일 밤
새 번역 성경: “토요일 밤에, On Saturday night”(NEV). 

⑵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방인이면서도 유대력사용(눅 23:54~56 참조)
성경이 말하는 하루의 개념은 “저녁부터 그 다음날 저녁까지”입니다.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 
  •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레 23:32).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은 금요일입니다. 그 사건에 대한 누가의 기록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 금요일: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눅 23:54)
  • 현대인 성경으로 보면 그 뜻이 더 분명합니다. “그 날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금요일이었는데 안식일이 곧 시작되려는 참이었다”(눅 23:54)
  • 안식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눅 23:56)
  • 일요일: “안식 후 첫날 새벽에…무덤에 가서”(눅 24:1)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경(막 15:34, 유대시간으로 9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을 금요일 밤이라 하지 않고 안식일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요일 오후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서부터 일곱째 날(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금요일은 성일(聖日)을 예비하는 날이요, 토요일은 성일이고, 일요일은 성일 다음 날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이고, 중요한 날은 안식일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사건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날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예비일

안식일

안식 후 첫날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

무덤에 쉬신 날

부활하신 날

성일을 준비하는 날

성일

성일 다음 날

“그 날은 안식일 전날, 곧 안식일을 준비하는 금요일이었다”(현대인, 막 15:4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

“안식 후 첫날 새벽에”(눅 24:1)



 “안식 후 첫날(μια των σαββατων)”이라는 말은 유대력의 용어
로마력을 썼다면 dies solis(일요일)이라는 용어를 썼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예비일(금요일), 안식일. 이렇게 날짜계산을 했습니다. 안식일은 그들 삶의 중심이었지요.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눅 23:54~56).


이제 우리는 양심껏 대답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거의 되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금요일 저녁이지요. 마찬가지로 안식 후 첫날은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합니다.

 

(4) 송별집회
사도 바울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계획에 따라 급히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안식 후” 곧 토요일 밤에 다시 모여 성만찬을 겸한 애찬을 나누며, 말씀을 자정이 넘도록 들었는데, 이렇게 밤늦게까지 모인 까닭은 이튿날 날이 새면 바울이 떠나기 때문에 특별집회로 모인 것이었습니다(행 20:7.8). 그 다음날 바울은 육로로 32km 길을 걸어 앗소로 가서, 뱃길로 먼저 가 기다리던 누가 일행을 만나 여행을 계속하여, 미둘레네 → 사모 → 밀레도에 수요일에나 목요일쯤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가져 심금을 울리는 설교를 했습니다(행 20:14~38).

(5) 안식일 준수
이와 같은 문맥을 이해할 때, 사도는 안식일에는 결코 길을 떠나지 않고, 자기 규례대로 신자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곧 “안식 후… 이튿날 떠나고자하여”(20:7) 밤중까지 특별집회를 했고, 밀레도에서는 주중인 수요일이나 목요일인데도 다시 에베소의 장로들을 위해 특별 집회를 한 것입니다. 이 두 집회가 모두 그렇게 촉박하고 간절했던 이유는, 그것이 바울의 마지막 여행으로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행 20:37,38). 그러므로 문맥에서 분명해진 대로, 사도 바울이 여행 중에도 철저히 지킨 날은 안식일이며,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은 여행을 떠나는 평범한 날 이었음이 분명해집니다.
 
(6) 교회역사가 네안더(Augustus Neander)
일요일을 준수하는 탁월한 교회사가인 네안더도 사도행전 20장의 사건이 일요일을 성수했음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아래와 같이 솔직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 구절은 전적인 확증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의 촉박한 출발이 이 작은 교회로 하여금 형제애가 넘치는 송별 식사를 위해 모이게 했을 것이고, 이 경우 특별한 축제가 아니었을지라도 사도는 이때에 그의 마지막 말씀을 전달하였을 것이다”(Augustus Nnneander,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RRreligion and Church, 1831, vol. 1. 337).
 

6. 바울의 마지막 호소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customs, 관습)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니”(행 28:17).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바울이 안식일 외에 다른 날을 준수했다면, 어떻게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이 유대인의 관습을 범한 적이 없다고 외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유대 교회지도자들 앞에서 외친 마지막 호소에서 그는 생애를 끝마치는 순간까지 철저한 안식일 준수자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안식일이 이방인에게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의식적인 율법이었다면,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그리스도인 안식일이 제칠일에서 일요일로 바뀌어진 사실을 분명히 밝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다”(행20:27)고 선언합니다.

만일 일요일이 성경적으로 거룩한 예배일이라면, 우리의 종교적 의무는 훨씬 쉬워질 것이며, 율법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인기 있는 길이나 편리한 방법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최고의 권위로 선포하신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철회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십계명을 오늘날에도 구속력 있는 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주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를 조종함으로써 안식일 준수를 어렵게 만든 장본인은 사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단 하나의 계명에 불순종하기보단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문제는 날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를 기계적이고 비참하게 만들 것입니다.

posted by Yaacob